철도이야기

철도의 아버지 조지 스티븐슨과 세계 최초 철도의 탄생

녹색열매 2010. 4. 2. 09:54

섹션 오피니언 > 등록일 2008-09-16
작성자 홍보실 (admin)
철도의 아버지 조지 스티븐슨과 세계 최초 철도의 탄생
1804년, 트레비딕이 원시적 증기기관차를 만들어 화차를 끄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실용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철도가 실용적인 교통수단으로 등장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은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이었다. 역사는 한목소리로 그를 ‘철도의 아버지’라 부른다.

1800년 6월 9일, 영국 북동부 뉴카슬(Newcastle) 지역의 광산에서 일하던 한 젊은이가 독학으로 글을 배워 마침내 자신의 이름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을 쓸 수 있게 된 것으로 19번째 생일을 자축했다. 당시 읽고 쓸 수 없다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도시에 있는 값비싼 학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문이 열려 있지 않았다. 읽고 쓸 줄 몰라도 광산 노동자로 취직하는 것은 건장한 젊은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의 아버지는 광산의 물을 퍼내는 배수장에서 펌프를 작동시키는 증기기관에 불을 때는 화부로 일하고 있었는데, 조지 스티븐슨은 20세의 나이에 벌써 일반 인부 수준을 넘어 자신이 맡은 기계의 보수 작업을 책임지는 정비사(Mechanic)로 승진했다. 일주일을 일하고 받는 급료는 겨우 3펜스. 하지만 야망이 커서 정비사를 뛰어넘어 기계의 설계·제작 등을 할 수 있는 기사, 즉 엔지니어(Engineer)가 되고 싶어 했던 스티븐슨에게 마침내 글자와 책의 세계가 활짝 열린 것이다. 인간의 노동을 가볍게 해주는 기술적인 장치라면 무엇이든 매료되었던 그는 곧 여러 발명가의 특허 자료들을 해독할 수 있게 되었고, 광산의 몇몇 기계를 실용적으로 개선하면서 그 지역에서 뛰어난 정비사로 유명해졌다.
철도는 일찍부터 그가 관심을 보인 대상이었다. 처음에는 목재 레일, 후에는 철제 레일 위를 말에 이끌린 짐차가 끊임없이 덜커덩거리며 그의 집 앞과 탄광들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 무렵 광산의 갱 내를 환히 밝혀주던 램프로 인해 큰 가스 폭발 사고가 나자 당국은 1000파운드의 상금을 걸고 안전 램프를 공모했고, 스티븐슨과 데이비(Davy)란 이름의 교수가 같은 시기에 발명품을 각각 제출했다. 모양은 약간 달랐지만 두 사람의 발명품은 램프의 불꽃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차단하는 원리가 같아 동일한 효과를 내었다. 그러나 포상위원회가 상금을 교수에게만 주기로 결정하자 탄광의 광산주들이 돈을 걷어 1000파운드를 스티븐슨에게 주었다.

최초의 실용적 증기기관차 ‘블뤼허’
트레비딕이 뉴카슬(Newcastle)에서 증기기관차를 선보였을 때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본 의지의 사나이 스티븐슨에게 일생의 목표가 일순간에 분명해졌다. ‘철도! 기관차와 철도를 만들자.’ 증기기관과 관련된 발명가들의 자료들을 해독할 수 있게 된 스티븐슨은 피스톤이 매번 왕복한 힘이 연속적인 회전운동으로 바뀌도록 관성을 주는 거대한 플라이휠(Flywheel)이 장착된 트레비딕의 기계와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던 머독의 원시적 기계 등을 주의 깊게 공부했으며, 몇 년간 증기 동력차의 비전에 사로잡혀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는 모든 장치들을 시험해보았는데, 언제나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강인한 성격을 가졌고, 지극한 성실함으로 존경받았던 스티븐슨은 탄광 주인들에게 그들의 석탄을 ‘더 빠르게, 더 안전하게, 그리고 더 저렴하게’ 운반할 ‘이동 기계’1)를 만들도록 그를 지원해줄 것을 설득했다.
계약을 맺고 광산의 기계 공장에서 10개월여 일한 끝에 드디어 1814년 7월 25일, 스티븐슨은 킬링워쓰(Killingworth)에 있는 마차 궤도(Horse Tramway)에서 그의 첫 기관차를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 이 기계에 적용된 혁신적 특징은 실린더의 롯드가 직접 바퀴를 돌리도록 연결시키고, 플랜지가 있는 바퀴를 사용해 레일과 바퀴 간의 단순한 마찰력만으로 달리게 한 것이었다. 당시 영국군과 함께 나폴레옹을 무찌른 프러시아 장군 이름을 따서 ‘블뤼허(Blucher)’라 이름을 붙인 이 최초의 실용적 기관차는 무게가 6톤밖에 나가지 않음에도 궤도를 따라 30톤을 실은 8량의 짐차를 끌고 말보다 더 빨리 갈 수 있었다. 이 시범은 아주 성공적이어서 관계자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스티븐슨의 이름은 그가 갱 내에서의 안전 램프를 발명해 수많은 광부와 그 가족들을 크게 안심시켰던 때보다 더 많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영국의 모든 탄광 지역에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어 스티븐슨은 몇 년간 같은 형태의 기관차를 많이 만들게 되었다.
동시대의 엔지니어들은 학교 교육을 받지 않은 이 개척자의 명성이 올라가는 것을 시기했는데, 조지 스티븐슨은 현명하게도 자신과 똑같이 철도의 매력에 사로잡힌 아들 로버트(Robert)를 정규 학교 과정에 입학시켜서 미래에 희망을 걸 수 있었다.

세계 최초의 철도 ‘스톡톤-달링톤 철도’
1821년은 스티븐슨 부자에게 운명의 전환점이 되었다. 큰 도시로의 석탄 수송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더램(Durham) 지역의 탄광들을 위해 티즈 강(River Tees) 어귀에 위치한 스톡톤(Stockton)까지 운하를 건설할 것이냐, 아니면 새로운 시도로서 철도를 건설할 것이냐는 대안을 가지고 수차례 타당성 조사가 시행된 끝에 결국 탄광에 가까운 큰 도시인 달링톤(Darlington)을 경유해 스톡톤까지 새 더램 철도 건설을 뒷받침하는 법령이 의회를 통과해 국왕의 조인을 받았던 것이다. 스톡톤에서는 런던에서 온 연안 수송선에 석탄을 옮겨 실을 수 있었으니 탄광선을 아주 길게 연장 건설하는 개념이었다.
당시의 간선 운송 수단이던 운하를 이기고 철도가 채택된 배경에는 운하를 놓을 경우 큰 도시인 달링톤이 노선에서 배제되어 석탄을 공급받기 어렵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타당성 조사가 진행되던 무렵 더램 지역에서 약 60km 북쪽에 있는 타인사이드(Tyneside) 지역의 탄광선에서 스티븐슨의 기관차 5대가 17량의 짐차(화차)와 함께 64톤의 석탄을 나르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대단했고, ‘철마(Iron Horse)’라는 신조어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이러한 뜨거운 인기와 기대감이 ‘철도의 시대(The Railway Age)’가 왔음을 만방에 알린 1825년의 역사적 진보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스톡톤-달링톤 철도의 건설 책임자로 선정할 것인가? 전 세계를 통틀어 이제 53번째 기관차를 제작한 조지 스티븐슨보다 더 경험 많은 전문가가 어디 있는가? 스티븐슨은 이 제의를 받아들여 사업을 아주 세부적인 데까지 조직했다. 1823년 스티븐슨 부자는 뉴카슬에 기관차 제작회사를 설립했는데, 전문 교육을 마치고 이제 20세가 된 아들 로버트가 책임을 맡았다. 회사의 자본은 1000파운드. 스티븐슨이 광부용 안전 램프를 발명해 광산주로부터 받은 돈이었다.

스티븐슨은 5개월에 걸쳐 이 노선을 정밀 조사했다. 탄광들이 있는 북쪽의 쉴돈(Shildon)에서 달링톤까지는 주로 언덕 지대로 약 14km, 달링톤에서 스톡톤까지는 평지로 약 20km쯤 되었는데 당시 대부분의 엔지니어에게는 무시무시한 난제로 보였다. 이렇게 긴 거리에 철도를 놓는 시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초기 발전 단계에 있었던 기관차로는 언덕을 오르는 것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선로는 가급적 평탄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언덕이 불가피한 구간에는 로프를 감아 당기는 고정형 기관(Stationary Engine)을 설치해 로프로 짐차를 끌도록 했다. 탄광이 있는 높은 지대에서 평지로 석탄차를 운반할 때는 언덕 위에 고정 설치된 증기기관에 로프를 연결해 짐차를 내린 후 언덕과 언덕 사이 짧은 평탄 구간에서는 말이 끌고, 다시 로프 견인 방식으로 언덕을 넘어 산악 지역을 벗어난 후 강가에 이르기까지 장거리의 평지 구간에서는 기관차로 끄는 방식이 적용되었다. 땅 주인들은 측량기사들에게 돌까지 던져가며 작업을 방해하는 데 한몫 거들었다. 심지어 달링톤 경(Lord Darlington)은 폭폭거리는 철마들이 여우 사냥을 방해하도록 허락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었다.
레일은 단단한 철제여야 했다. 그때까지 많은 발명가들은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들에 대해 논쟁을 벌여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실으면 바퀴가 제자리에서 미끄러지며 헛돌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이유로 인해 블렌킨솝(Blenkinsop)은 옆면에 톱니가 붙은 치차 레일(Rack Rail)을 실험했으며 윌리엄 브룬톤(William Brunton)은 심지어 목발처럼 땅을 짚고 미는 추진력을 이용한 기계를 구상하기도 했다. 지금도 알프스의 산악 철도처럼 급경사에 설치한 철도는 톱니가 붙은 치차 레일을 사용하지만 일반적인 평탄선에서 철도는 무거운 기관차의 바퀴가 철제 레일을 누르는 마찰력으로 충분히 잘 달린다.
그의 경험에 비추어 스티븐슨은 달군 철을 해머로 두들겨 강인한 특성을 갖게 한 단조 레일(Wrought-iron Rail)만이 정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철을 녹여 레일 형상의 틀에 부어서 만든 주조 레일은 값이 싸지만 쉽게 부러지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보면 비용이 더 많이 들었다. 그가 채택한 레일(Cast-iron Rail)은 1m당 14kg의 어복 레일(Fish-bellied Rail:생선의 불룩한 배 형상을 가진 레일)이었는데, 길이는 3.6m와 4.5m 두 종류가 쓰였다. 평행한 레일 사이의 안쪽 간격을 의미하는 궤간(Gauge)의 규격은 당시 스티븐슨의 기관차가 운행 중이던 탄광선과 같은 4피트 8.5인치, 즉 현 철도의 표준 궤간인 1435mm2)가 채택되었다.
작업이 진전됨에 따라 스티븐슨은 모든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동이 틀 때부터 어스름이 다가올 때까지 건설 현장 여기저기에서 터벅터벅 걸어다니는 큰 몸집이 보이는가 하면 위원회의 회의에 참석하러 시청에 들어가는 등 중요한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에는 어디든지 그가 있었다. 뉴카슬의 기관차 제작소에서는 철도회사로부터 주문받은 2대의 기관차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관들이 보일러 속으로 삽입되어 관 주위를 순환하는 물들이 더욱 빨리 열을 받아, 더 큰 증기력을 얻을 수 있는 방식이었다.
레일을 지탱해주는 침목으로는 평지 구간에는 오크나무 블록(너비 15cm, 길이 50cm, 높이 15~20cm)이, 언덕 구간에는 단단한 석재 블록(너비 45cm, 길이 45cm, 높이 25~30cm)이 사용되었는데, 스티븐슨은 블록을 노반에 심는 작업들을 때때로 감독하면서 일꾼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철도가 이 나라에 있는 다른 모든 교통수단을 대신할 날이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철도로 여행하는 비용이 걸어서 여행하는 것보다 더 싸게 드는 날이 올 것이다.” 석탄 등 화물을 수송한다는 처음의 개념과는 달리 스티븐슨은 이제 단지 화물만이 아니라 여객 수송까지도 포함해 철도를 생각하고 있었으며, 화물을 싣는 짐차에 사람이 서서 타는 방식만이 아니라 편안한 의자가 있는 여객 전용 객차까지 만들어 승차감을 시험했다.

‘철도 시대’의 개막을 알린 개통 행사
개통일인 1825년 6월 27일이 다가왔다. 개통 행사를 알리는 전단이 뿌려졌으며, 일련의 기념행사들이 세세하게 계획되고 진행되었는데 이 개통 행사 자체만으로도 스티븐슨의 조직적 일 처리 능력을 엿볼 수 있었다. “스톡톤과 달링톤 철도회사는…”이라는 발표와 동시에 ‘사전 선로 조사대’의 출발과 일꾼들을 위한 저녁 식사, 철도회사 투자자·귀족·토지 소유자 등 귀빈들을 위한 달링톤 시청 연회에 이르기까지 기념행사들은 ‘정확한’ 시간에 진행되어 철도가 초기부터 정시성에 대하여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보여주었다. 행사의 핵심은 기념 열차의 행진이었는데, 탄광의 언덕 지역을 벗어나 평탄선이 시작되는 지역에서 출발한 이 행렬은 기관차가 끄는 열차와 말이 끄는 짐차들로 구성되었다.
많은 군중이 스톡톤과 달링톤 및 선로 연변의 마을들로 모여들었다. 철길과 도로가 나란히 놓인 일부 구간에서는 말과 역마차를 탄 사람들이 열차와 함께 달리기도 했는데, 열차의 최고 속도는 시간당 15~24km에 이르렀다. 스티븐슨이 직접 조종간을 잡은 기관차 로코모션 제1호(Locomotion No. 1)가 600여 명의 승객과 산더미 같은 짐을 실은 34량의 짐차를 끌고 시골길을 지나가는 모습은 특히 인접 도로에서 뒤따라 달리는 4마리의 말이 끄는 승객용 마차에 겨우 16명이 타고 가는 것과 비교되어 관중들에게 경외와 탄성을 불러일으키며 ‘기적’ 그 자체로 받아들여졌다. 비록 증기기관차만 운행하는 것이 아니라 로프를 당기는 고정형 기관과 말이 끄는 방식을 혼용하는 노선이었지만 세계 최초의 철도가 탄생한 것이다.


[스톡톤-달링톤 철도 개통 기념 열차의 구성]
①기관차 로코모션 제1호가 끄는 열차
- 기관차에 쓸 물과 석탄을 실은 탄수차
- 석탄, 상품들을 실은 6량의 짐차
- 위원회와 소유주들을 태운 회사의 여객 전용 객차
- 일반 공중에게 예약된 지정석을 가진 6량의 짐차
- 일꾼들과 관계자들을 수송하기 위한 14량의 짐차
- 달링톤 지선에서 분리되어 다른 목적지로 향할 석탄을 실은 6량의 짐차
②일꾼들과 관계자들을 태운 6량의 짐차로 구성된 4개의 마차 대열

[각주]
조지 스티븐슨(1781~1848).
탄광 기관부의 아들로 태어나 14세 때 아버지의 조수가 되고 뒤이어 광산 정비사가 되었다. 1814년 첫 기관차를 선보인 데 이어 1823년 세계 최초의 기관차 제작 회사를 설립하고, 1825년 기관차 로코모션 제1호를 직접 시운전하여 철도 시대를 열었다. 1847년 기계학회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 이동 기계
스티븐슨은 이동기계(travelling machine)에 ‘기관차(locomotive)’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붙였다

2) 표준 궤간 1435mm
홀브룩(Holbrook)에 따르면, 이 간격은 로마 제국의 2륜전차 바퀴 사이의 간격과 같다고 한다. “로마 제국이 영국을 정복할 시기에 이 2륜전차들이 영국 전역을 굴러다녔고, 당시의 원주민들도 이를 바꿀 특별한 이유가 없었기에 로마인이 물러간 이후에도 마찻길은 같은 치수로 남아 있었다. 철도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에도 초기에 궤도 위를 말이 끄는 마차가 달리는 방식으로 시작되어 그 궤도 간격이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글_김천환 코레일 여객사업본부장)
· 참고 서적 [The History of Railway](Erwin Berghaus)

* 이 글은 '철도의 이해'라는 코너로 KTX매거진에 연재된 총 8편 가운데 2008년 3월호 실린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