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이야기

리버풀&맨체스터 철도와 레인힐 기관차 경주대회

녹색열매 2010. 4. 2. 09:53

섹션 오피니언 > 등록일 2008-09-16
작성자 홍보실 (admin)
리버풀&맨체스터 철도와 레인힐 기관차 경주대회
1825년 개통된 스톡톤&달링톤 철도는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외국의 엔지니어와 공직자들에게도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다. 말이 아닌, 증기엔진으로 움직이는 공공철도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경이로움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 세상을 달군 스톡톤&달링톤 철도마저 빛을 잃게 만든 프로젝트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듬해, 리버풀과 맨체스터를 철도로 연결하는 법안이 의회를 통과한 것이다.

1825년 개통된 스톡톤&달링톤 철도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말의 힘을 이용하는 마차 궤도가 아니라 증기엔진으로 움직이는 공공철도를 처음으로 목격했다. 증기엔진은 아직 조악한 수준이었지만, 그 잠재력과 발전 가능성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한 미국인 기술자는 “말의 품종을 더 개량하는 것은 거의 기대하기 어렵지만 철마의 품종 개량이 어디까지 이를 것인지는 현시대의 누구도 알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재치 있게 말했다. 여기저기서 철도 건설 계획이 논의되기 시작했고, 스톡톤&달링톤 철도마저 빛을 잃게 만든 엄청난 프로젝트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영국 산업혁명의 중심지인 리버풀(Liverpool)과 맨체스터(Manchester)의 돈 많은 사람들이 두 도시를 철도로 연결하는 계획을 스티븐슨과 협의해왔던 것이다.
리버풀&맨체스터 철도회사는 그때까지 존재했던 어떤 기업보다 큰 규모의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었는데, 이 계획은 철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뺀 모든 이들에게 환상적으로 보였다. 리버풀-맨체스터 노선은 약 45km에 달했는데, 오르막과 내리막 급경사를 피하고 최대한 평탄하게 레일을 깔기 위해서는 63개의 교량, 거대한 아치 9개로 받쳐 올린 540m 높이의 고가교 1개, 페닌즈 산맥을 통과하는 540m 깊이의 개착로(cutting 터널 건설을 피해 산을 깎아 만든 통로) 한 곳 등을 건설해야 했다. 이 노선은 또한 ‘차트 모스(Chat moss)’라고 불리는, 사람과 차량이 다닐 수 없는 늪지를 건너야 했다. 건설 장비들이 제한되어 있었던 당시의 철도 건설자들에겐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모르지만, 좌우간 우리는 해내게 될 것이다.”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스티븐슨은 지형을 분석하고 측량 작업을 시작했다. 공식적 건설 허가가 나기 전이었므로,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르는 농부들의 눈에 띄지 않게 작업은 은밀히 추진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은 리버풀&맨체스터 철도 법안이 의회에서 토의될 때 그가 겪어야 했던 현시대의 청문회 같은 시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철도 건설 법안이 통과될 때까지의 시련
화려한 언변을 지니지도, 논리적인 토론 교육도 받지 못한 탄광 노동자 출신인 조지 스티븐슨과 맞선 상대는 몇 세기에 걸쳐 누려온 자신들의 특권이 위험에 처해질까 두려워하는 지주 출신의 엘리트 신사들이었다. 스티븐슨이 어눌한 말투로 사투리를 섞어가며 그의 주장을 펼칠 때 상대방들은 노련한 변호사들을 동원했다. 그러나 스티븐슨의 옆에는 보이지 않는 조력자가 버티고 있었으니 바로 연기를 내뿜어 들판을 그을리고 소들을 놀라게 하는 괴물, 증기기관차였다.
이후 세계 각국의 철도 건설 과정에서도 수없이 반복될 터이지만 ‘철도는 속도가 빨라서 위험하다’는 반대론이 공개석상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스티븐슨은 빠를수록 균형을 잡기 쉬운 아이스 스케이팅에 비유해 기관차가 빨리 달릴수록 더욱 안정감이 느껴진다고 대응했다. “만약 한 시간에 20km의 속도로 달리는 기관차가 갑자기 소하고 충돌하면 치명적이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물론 무척 치명적이다, 그 소에게는”이라고 받아넘겼다.
그러나 철도가 지닌 경제적 의미가 조사되었을 때, 반대론 뒤에 숨어 있는 진정한 동기가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바로 ‘돈’이었다. 도로 건설과 보수에 이미 많은 돈을 투자한 재산가가 물었다. “이 모든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아야겠다. 마차에 쓰이는 마구 제작자, 마차 제조자, 마부, 도로변 여관 주인, 말 사육자와 거래상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모두 철도회사의 주주가 될 것이다”라고 스티븐슨의 친구들이 대답했다.
보수적인 엔지니어들은 “차트 모스를 통과하려는 계획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모든 기관차들이 늪 속으로 가라앉아 버릴 것이다. 그것은 미친 짓이다”라고 주장했다. 스티븐슨도 이것이 문제라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그 주장에 대항할 논리는커녕 자기 스스로도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의 사람됨이 풍기는 잘못될 리 없다는 자신감이 반대자들을 극복하게 하여 마침내 한 번 부결되었던 리버풀&맨체스터 철도 법안은 수정된 형태로 1826년 의회를 통과했다.
차트 모스는 약 50km2에 이르는 늪지였다. 첫 측량 때 몸이 무거운 스티븐슨은 무릎 깊이까지 빠져서 직원들이 구출해내야만 했다. 그는 신발 밑에 스키처럼 넓은 판자 조각을 매어 늪에 빠지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6톤이나 나가는 기관차가 견딜 수 있을까? 그는 6km에 이르는 늪 구간을 나무로 덮어버리거나 뻘을 모두 빼내는 거대한 계획까지 고려했으나 이를 포기하고, 결국 늪을 메워나가기로 했다. 늪에 쏟아 부은 몇 개 화차 분량의 마른 뗏장이 밤중에 깊이 가라앉아버리자 그도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티븐슨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몇 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백 명의 일꾼들이 횃불을 비춰가며 차트 모스에 뗏장들을 끊임없이 던져 넣었다. 질퍽거리는 거대한 늪지에 마침내 단단한 기초가 형성되었다.

본격적인 철도 시대의 개막,
리버풀&맨체스터 철도

그러나 차트 모스에 대한 고민이 해결되었다고 걱정과 장애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기관차가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는 동력원인가? 선로 옆에 고정형 증기기관을 설치해 선로를 따라 체인으로 열차를 끄는 것이 더 낫지 않나? 말이 끄는 교통으로 돌아가는 것이 사실 더 경제적이지 않을까? 스티븐슨은 완전히 새로운 수송수단으로서 철도의 잠재력을 꿰뚫어 본 선구자였다. 그러나 통행료를 내는 공공시설인 궤도 위에 자기 소유의 마차를 달리게 하던 그 시대의 상인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1825년 개통된 스톡톤&달링톤 철도는 경사가 심한 구간은 언덕 위 선로 변에 고정형 증기기관을 설치해 로프로 끌고, 언덕 사이 짧은 평탄선 구간에서는 말을 사용하다가 긴 평탄선 구간에서만 제한적으로 증기기관차를 사용하는 복합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또한 탄광 철도선을 길게 연장하는 개념으로서 광산의 석탄을 큰 배가 닿는 강어귀 나루터까지 수송할 목적으로 건설했기 때문에 여객 수송은 비정기적으로 마차 운영회사에 위탁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리버풀&맨체스터 철도는 두 대도시 간을 여행하는 승객 수송에서 70%의 수입을 벌어들이는 정기 여객열차 위주 노선이었다. 동력원으로는 기관차만 사용하고 따라서 궤도차량도 철도회사가 소유하는 방식으로 운영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는데, 오늘날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 운영 계획이 당시에는 혁신적인 발상이어서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 문제에 대해 아들 로버트와 의논한 끝에 스티븐슨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투자자들에게 개통을 앞둔 리버풀&맨체스터 철도에서 기관차의 견인 성능을 테스트할 경기를 개최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의심이 많은 사람들까지도 그의 제안에 감명을 받았고, 곧 영국과 유럽 대륙의 모든 엔지니어들이 이 제안에 대해 논의하게 되었다.
경주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기관차의 무게가 6톤 이하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기관차가 평탄선에서 제 자신의 무게보다 3배 이상 무거운 열차를 시속 16km로 연속적으로 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대 보일러 압력은 4.2 kg/cm2를 넘으면 안 되고, 굴뚝까지 포함한 전체 높이는 3.6m를 초과하면 안 된다. 우승에는 500파운드의 상금이 걸렸다.
한동안 스티븐슨은 리버풀과 맨체스터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로버트의 이름으로 운영 중인 기관차 제작소에 칩거하며 비밀리에 작업을 진행했다. 제작소 안에서 무엇이 만들어지고 있는지는 그들 부자만이 알고 있었지만, 조지와 로버트는 이 작업에 걸린 것이 단지 500파운드의 상금만은 아니라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레인힐 기관차 경주 대회
조지 스티븐슨은 이미 많은 성공을 거두어왔지만, 1829년 10월 6일은 가장 빛나는 성공을 거둔 날이었다. 레인힐(Rainhill) 근처, 리버풀&맨체스터 선로 중 이미 완공된 구간에서 세계 최초의 철마 경주대회가 열렸다. 기계적인 구조나 창의성, 색상과 디자인에서 아주 다른 5대의 기관차가 경주에 참가했다. 노벨티(Novelty)호는 구리색과 파랑, 상 파레이유(Sans Pareil)호는 초록과 노랑, 검정, 로켓(Rocket)호는 노랑과 검정에 하얀 굴뚝이 달려 있었다. 다른 두 대의 기관차 사이클로페드(Cycloped)호와 퍼시비어런스(Perseverance)호는 진행 중 일찍이 탈락했다.
각 기관차가 20회를 돌아 총 112km를 달리도록 구성된, 약 3km 길이의 경주 코스는 질서 유지와 안전을 위해 200명의 경찰관이 투입되었다. 테스트는 하루에 한 대씩 이루어졌다. 첫날, 마치 새 찻주전자처럼 반짝이는 노벨티호가 등장했다. 리버풀 주위에서 모인 1만여 명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벨티호는 그레이하운드처럼 힘차게 출발했으나 너무 빨리 힘을 잃었다. 2톤밖에 나가지 않는 가벼운 무게 때문에 기관차가 곧 멈추었고, 다시 달리는가 싶으면 또다시 멈추는 일이 반복되었다. 상 파레이유는 조악한 솜씨로 만들어져서 석탄을 실은 짐차를 연결하자 아예 움직이지도 못했다.
마지막으로 로버트 스티븐슨이 로켓호를 내놓았다. 조지 스티븐슨이 조종간을 잡은 로켓호는 이름에 걸맞게 선로 위를 로켓처럼 질주했다. 한 번의 고장도 없이, 별 힘도 들이지 않고 깜짝 놀랄 만한 속도로 여러 번 반복해서 달렸다. 때는 1829년, 이 세상에서 자신의 동력으로 그렇게 빨리 움직이면서 제 자신의 무게보다 세 배나 무거운 짐을 끌 수 있는 기계는 전혀 없었다. 스티븐슨이 무개차와 탄수차를 풀어내자 로켓호는 시간당 약 50km라는 놀라운 속도에 도달했다! 심판들은 만장일치로 로켓호를 선택했다. 이 기관차야말로 전 세계 각국에 퍼져나간 수천 수만 대에 이르는 증기기관차의 원조가 되었다. 로켓호의 제작 시 확립했던 본질적 사항은 증기기관차의 전 역사를 통해서 전혀 바뀌지 않았다. 레인힐의 경주는 증기기관차에 대한 의심을 말끔히 없애버렸고 리버풀&맨체스터 철도회사의 이사회는 당장 같은 형태의 기관차 8대를 주문했다.
로켓호는 당장 작업에 투입되어 건설 현장을 오가기 시작했다. 전원 풍경을 망친다고 불평했던 사람들도 막상 공사 잔해를 치우고 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하자 반대했던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홍보에도 탁월한 재능을 지닌 스티븐슨은 완공된 리버풀&맨체스터 선로를 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대의 인기 여배우 화니 켐블(Fanny Kemble)을 기관차 운전실로 초청한 것이다.
1830년 8월 26일자로 된 그녀의 편지는 그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는 레일 위를 따라 조그만 기관차로 안내되었어요. 그녀(그들은 이 묘한, 불을 먹는 말들을 모두 암말로 만들었어요)는 보일러, 아궁이, 조그만 플랫폼, 긴 의자, 의자 뒤에는 그녀가 24km를 달려도 목마르지 않도록 충분한 물을 담은 통이 있었고, 전체 엔진이 보통 소방차보다 크지 않았어요. 또 ‘피스톤’이라 불리는 반짝이는 강철 다리와 10개의 바퀴로 된 발도 있었죠. 피스톤은 증기로 움직이는데, 증기가 피스톤의 윗부분에 더 많이 가해질수록 더 빨리 움직여요. 이 놀라운 짐승의 고삐와 재갈, 굴레는 조그마한 강철 손잡이인데 다리, 즉 피스톤에 증기를 보냈다 빼냈다 할 수 있어서 어린아이도 다룰 수 있을 정도예요. 쓰다듬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만드는 이 칙칙폭폭거리는 작은 동물을 객차에 매고, 스티븐슨 씨는 나를 엔진의 벤치에 안내했어요.
우리는 시속 16km로 출발해서 나중엔 시속 56km까지 속도를 올렸어요. 여러분은 공기를 가르는 기분이 어떤 느낌인지 상상할 수조차 없을 거예요. 달릴 때의 움직임은 아주 부드러웠어요. 내가 읽고 쓸 수 있을 정도로요. 나는 일어서서 모자를 벗고 얼굴을 스치는 공기를 들여마셨지요. 이 느낌은 형언할 수 없이 낯설면서도 매우 즐거웠어요.”
리버풀&맨체스터 철도는 9월 15일 웰링턴 공작이 참석한 가운데 공식 개통되었다. 더없이 화려하게 치장된 객차가 귀빈을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국내외 산업계의 저명인사들이 새로운 고속 수송수단을 눈으로 직접 보고 그 경제적 중요성을 평가하고자 참석했다.
수천 명의 관중들이 손과 모자, 손수건 등을 흔드는 가운데 그날의 8개 열차 중 선두 열차가 리버풀을 떠나 철도 연변의 관중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맨체스터에 도착했다.
리버풀&맨체스터 철도는 스티븐슨과 그의 지지자들의 승리를 확인했으며, 이후 철도 건설 사업을 계속 이끄는 도약대가 되었다. 스티븐슨과 그의 기관차는 온 세계 철도의 발전에 엄청난 가속을 붙였다. 철도가 마침내 확고히 자리 잡은 것이다.


[증기기관차의 원조 로켓호와 철도의 아버지 조지 스티븐슨]
전문가들은 1825년 프랑스인 마르크 셰니에(Marc Segnier)가 제한된 공간에서 열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관 속에 뜨거운 가스를 통과시켜 주변을 둘러싼 물을 가열시키는 실험을 했음을 알고 있었다. 조지 스티븐슨은 이 시스템을 채택했으며 이것은 훗날에까지 증기기관차의 본질적 모습으로 남았다.

다른 기술자들이 바퀴를 돌리는 실린더를 차체에 수직으로 설치해온 것과 달리 스티븐슨은 트레비딕이 했던 것처럼 실린더를 거의 수평으로 놓았다. 높은 굴뚝을 통해 배기가스를 끌어내는 아이디어도 트레비딕으로부터 따온 것이다. 스티븐슨과 엔지니어 헤들리(Hedley)는 배출되는 증기의 시끄러운 소리를 줄이는 방법을 찾던 중 우연히 이러한 방식이 보일러에 공기가 더 잘 공급되도록 하여 증기 발생을 증가시켜주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의 엔지니어들과 일부 후세 작가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었지만 조지 스티븐슨의 전기를 쓴 작가 새뮤얼 스마일즈는 그를 의심할 바 없는 ‘철도의 아버지’라고 기술했고, 아무도 그에게서 이 영광스러운 칭호를 빼앗지 못했다. 물론, 한 시대를 새로 여는 기술적 진보에 대한 공로를 단지 한 사람에게만 돌리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때로는 서로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같은 일에 관여하며, 스티븐슨의 로켓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스티븐슨의 천재성은 그 자신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작품까지 적절히 조합해 최상의 것을 이끌어내는 능력에 있었다. 그는 위대한 엔지니어이자 화려한 조직가였고, 영리하고 과단성 있는 선전가였으며, 이제까지 아무도 이루지 못했던 일을 해낸 선구자였다. 로켓호는 그의 명성을 영원하게 했고, 철도의 탄생에 대해 우리가 그에게 감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글_김천환 코레일 여객사업본부장)
· 참고 서적 [The History of Railway](Erwin Berghaus)

* 이 글은 '철도의 이해'라는 코너로 KTX매거진에 연재된 총 8편 가운데 2008년 4월호 실린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