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이야기

철도가 바꾼 세상 새로운 시간과 공간들

녹색열매 2010. 4. 2. 09:36

섹션 오피니언 > 등록일 2008-09-16
작성자 홍보실 (admin)
철도가 바꾼 세상
새로운 시간과 공간들
철도가 도입되기 전 사람들은 지역에 따라 고유한 시간을 사용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런던의 시간은 브리지워터보다 14분이 빨랐다. 하지만 철도는 운영 특성상 정밀한 시간 규칙을 요구했고, 출발과 도착 시각을 정확히 표시하기 위해 시간을 통일해야 했다. 영국에서는 그리니치 평균시(Greenwich Mean Time)에 바탕을 둔 표준 시각이 각 철도회사의 전신망을 통해 제공되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GMT는 ‘철도 시간(Railway Time)’으로 불려왔다.
철도는 각 지역의 시간을 국가 표준시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 표준시까지 창조했다. 이렇듯 철도는 세상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으나, 험준한 산은 그 변화를 가로막는 장벽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854년 알프스를 넘은 젬머링 철도는 마침내 높은 산을 정복하고 변화의 혜택을 철도가 미치는 곳이라면 어디든 고루 나누어주게 되었다.

프랑스 철도와 공간 인식의 변화
프랑스 철도는 유럽 대륙에서 최초로 생 에티엔느(St Etienne)의 탄광선에서 짐차를 끌던 말이 증기기관차로 대체된 1832년에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탄광에서 생 에티엔느까지, 다음에는 리용(Lyons)까지 기차는 석탄뿐만 아니라 많은 승객도 실어 날랐다. 그리 오래지 않아 파리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철도망이 건설되었는데, 이와 같이 기관차가 세상을 급속하게 바꾸어나가는 모습이 뚜렷해지자 파리에서는 그 어느 지역보다 뜨겁게 철도에 대한 논쟁이 달아올랐다.
소설가 에드몽 드 공쿠르(Edmond de Goncourt)는 “철도 위에서는 너무 흔들려 생각을 모으기가 불가능하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백과사전 편찬자 피에르 라루스(Pierre Larousse)는 이 기계장치의 기적을 다음과 같이 환영했다. “철도! 마술적 영기(aura)가 이미 이 단어를 감싸고 있다. 철도는 문명, 진보, 그리고 동포애와 같은 뜻을 가진 단어다. 지금까지 인간들은 하늘과 바다의 생물들을 볼 때마다 일종의 부러움과 열등감을 느껴왔다. 하지만 이제는 철도 덕분에 새나 물고기도 인간보다 더 유리하지 못하게 되었다.”
1843년 파리에서 루앙과 오를레앙으로 가는 노선이 개통되었을 때 독일 시인 하이네(Heinrich Heine)는 철도를 화약과 인쇄술 이래로 “인류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고 삶의 색채와 형태를 바꾸어놓은 숙명적 사건”이라고 불렀다. 그는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제 우리의 직관 방식과 우리의 표상에 어떤 변화가 생길 것임에 틀림없다! 심지어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들도 흔들리게 되었다. 철도를 통해서 공간은 살해당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곤 시간밖에 없다. …이제 사람들은 세 시간 반 이내에 오를레앙까지, 그리고 같은 시간에 루앙까지 여행한다. 이 노선들이 벨기에와 독일까지 연결되고 또 그곳의 철도들과 연결된다면 어떤 일이 초래될 것인가! 내게는 모든 나라에 있는 산들과 숲들이 파리로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미 독일 보리수의 향내를 맡고 있다. 내 문 앞에는 북해의 파도가 부서지고 있다.”
파리에서 오를레앙까지 약 130km 거리를 세 시간 반으로 단축시킨 철도로 인해 ‘공간이 살해당했다’고 느꼈던 하이네의 ‘무시무시한 전율’을 이미 빠른 교통수단에 익숙해져 있는 오늘날의 우리가 공감하기란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살아가던 19세기 중반은 비행기나 자동차, 영상통화 휴대전화는 물론, TV와 라디오도 없던 시절이었고, 당시 일반적이었던 여행 방법인 도보 여행으로는 파리에서 오를레앙까지 꼬박 4, 5일이 넘게 걸렸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가 느낀 놀라움을 어느 정도는 가늠할 수 있으리라.
1849년부터 1891년까지 프랑스 철도망은 매년 약 760km씩 착실히 늘어나 1885년에는 약 3만km에 달했다. 국가는 철도회사들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1850년에 7개의 대형 회사가 합병되었고, 1878년에는 경영상 어려움을 겪은 여러 사철(私鐵)들을 국가가 사들이는 등 오랜 기간 국유화 과정을 거쳐 프랑스 국철(SNCF)이 탄생하게 되었다.

표준 시각을 확립한 철도 시간
철도가 도입되기 전부터 태엽이나 추, 나중에는 전기를 동력으로 하는 기계시계(궤종시계)가 발명되어 해시계나 모래시계 등을 대체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계시계는 보통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소지하기엔 너무 비쌌고, 정밀하지도 못해서 하루만 지나도 몇 분씩 틀리기 일쑤였다. 또 각 지방마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이 달라서 도시별로 고유한 시간을 사용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런던의 시간은 브리지워터보다 14분이 빨랐다. 지역 간 교통이 이런 시간의 차이를 의식하지 못할 만큼 느릴 때는 도시별로 시간이 달라도 문제가 없었으나, 철도로 인해 여행 시간이 짧아지자 지역 간 시간의 차이도 드러나게 되었다.
철도는 그 운영 특성상 정밀한 시간 규칙을 요구했고, 열차의 출발과 도착 시각을 정확히 표시하기 위해서는 사용하는 시간이 통일되어야 했다. 영국은 1840년대 후반에 각 철도회사들이 자체적으로 통일된 시간을 도입했다. 당시에는 현재 시각을 알리는 라디오도 없었기 때문에 매일 오전 10시와 오후 1시에 그리니치 평균시(Greenwich Mean Time)에 바탕을 둔 표준 시각이 각 철도회사의 전신망을 통해 시보로 전달되었다. 이렇게 전달된 표준 시각에 따라 각 역의 시계탑에 내걸린 시계가 조정되어 전국적으로 통일된 시간이 제공되었기 때문에, 이후로 오랫동안 GMT는 ‘철도 시간(Railway Time)’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제 철도 시간이 현지 시간을 대체해 버리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시계와 생활리듬을 철도역의 표준 시각에 맞추었다. 1880년대 말 영국의 표준 시각은 그리니치 평균시(GMT)로 통일한다는 법률이 의회에서 제정되었다.
미국에서 균일한 철도 시간을 도입하는 일은 더욱 절실했다. 미국은 국토가 워낙 넓다 보니 지역별로 시간 차이가 많이 나서 1880년대까지 50여 개의 시간대가 사용되었다. 기차역에는 현지 지역 시간을 알리는 시계와 각 철도회사들의 열차시각표에 따른 열차 시각을 표시하는 시계가 각각 필요했다. 따라서 여러 철도회사들이 모이는 큰 도시의 역에는 서로 다른 시간을 표시하는 시계가 여러 개 필요해서 피츠버그의 경우, 무려 여섯 개의 시계가 걸리게 되었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다면 오늘날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다양한 국적의 국제선 비행기를 떠올리면 된다. 도착지 시간은 서울 시간이지만 그 비행기가 어디서 출발했느냐에 따라 출발지 시간은 달라진다. 철도회사마다 본사가 위치한 지역 고유의 시간대에 따라 열차시각표를 편성하기 때문에 장거리를 운행하는 경우, 열차 시각을 현지 시간에 따라 계속 변경하기 곤란하므로 열차시각표에 따른 별도의 시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당연히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시간을 표준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었고, 미국 철도회사들은 1883년에 오늘날 미국에서 사용하는 4개의 시간대를 정했고, 1918년 연방정부는 이
4개의 시간대를 입법화하여 미국의 표준 시각을 제정했다.
철도는 각 지역의 시간을 국가 표준시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 표준시까지 창조했다. 철도망이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뻗어감에 따라 각 나라의 표준 시각을 조정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1884년 10월에 25개 산업국가 대표 41명이 세계의 표준시를 정하기 위해 워싱턴에 모였다.
회의 결과 본초자오선(本初子午線, prime meridian)은 그리니치 천문대를 통과하는 자오선(경도의 기준이 되는 선)으로 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그리니치 평균시(GMT)가 세계 표준시로 확정되었고, 각 나라들은 자국의 경도(180°가 12시간이므로 15°마다 1시간 차이가 남)에 따라 GMT에 시간을 더하거나 빼서 나라별 표준시를 정하게 되었다.
미국의 경우, 뉴욕을 비롯한 동부지역 도시들은 ‘GMT-5’, 로스앤젤레스를 비롯한 서부지역은 ‘GMT-8’을 표준시로 정해서 1880년대 이전 5~10분 단위로 달라지던 지역별 시간대를 4개의 시간대로 통합했다. 교류가 빈번한 이웃 나라와는 같은 시간대를 쓸수록 편리하므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서유럽 국가들은 ‘GMT+1’이라는 동일한 표준시를 쓴다. 러시아처럼 넓은 나라는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톡까지 7시간의 차이가 나므로 7개의 시간대를 운영하고, 중국은 여러 경도에 걸친 큰 나라인데도 경도 120°에 해당하는 베이징 표준시(GMT+8)로 단일화해 쓰고 있다.
우리나라는 서울이 경도 127°30′에 위치해 일본과 같이 경도 135°에 해당하는 ‘GMT+9’를 표준시로 정하고 있는데, 한때 잠시 경도에 따른 시간 계산 그대로 ‘GMT+8.5’를 표준시로 했다가 국제 간 교류의 불편 때문에 현재의 표준시로 되돌아왔다. 장래 한·중·일 3국의 교류가 유럽 수준으로 활성화되면 표준시를 ‘GMT+8’로 통일하자는 논의가 일지도 모른다.

유럽의 지붕 알프스를 넘은 철도
오스트리아는 1837년 수도인 비엔나 인근의 바그람(Wagram)이란 마을에서 최초의 증기기관차를 선보인다. 하지만 부드바이스(Budweis)와 린츠(Linz)를 잇는 교통은 높은 통행세를 내야 하는 좁은 길을 따라 터벅터벅 걷는 말들에 아직도 의지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5년 후, 오스트리아 북쪽 지방의 철도는 알프스 산자락에 위치한 글로그니츠(Gloggnitz)까지 뻗어왔다. 하지만 여기, 오스트리아를 남북으로 가르는 알프스 산맥 밑에서 모든 것이 멈춰버린다. 그 이유는 기관차가 그때까지 올라갈 수 있는 경사도가 200m 거리에 1m의 오르막(5/1000 구배)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도 노선은 대부분 평야 또는 경사가 완만한 지형을 골라 언덕은 깊게 깎아내고 낮은 곳은 높게 돋우거나 교량을 놓아 최대한 평탄하도록 건설했다.
철도로 알프스를 넘을 수 있을까? 오스트리아인 엔지니어 칼 리터 폰 게가(Karl Ritter von Ghega)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도전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 생애를 바쳤다. 북쪽 지방의 비엔나(Vienna)와 남쪽 지방의 그라츠(Graz) 사이에 놓인 험준한 산악길인 젬머링 협로(Semmering pass)를 철도로 연결한다면, 장차 북극해의 함부르크에서 아드리아 해의 트리에스테(Trieste)까지 철도가 다닐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적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이 사업 계획은 문외한에게만 대담하거나 실행이 어렵다고 보인 게 아니었다. 은퇴 후 세상을 뜨기 얼마 전 이 계획을 상담받은 조지 스티븐슨조차 ‘젬머링 철도’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반면, 게가는 ‘철도의 아버지’보다도 더 증기기관차의 능력을 확신하고 있었다. 1840년대 초에 게가는 미국에 건너가 30여 개 철도 노선을 공부했는데, 기관차 제작 공장들을 둘러보고 나서 기관차가 로프의 도움 없이 순수한 마찰력만으로 30대 1의 오르막도 다닐 수 있음을 확신했다. 따라서 게가는 미국 필라델피아의 공장에 그의 첫 기관차를 주문했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게가의 신념이 오스트리아 당국에도 전해져, 공공자금의 낭비라는 반대파들의 비방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관료적 체계에 비추어볼 때 놀랍게도 망설임 없이 허가를 내주었다.
1848년에는 그라츠 인근 라이바흐(Laibach)로부터 출발한 남부 철도가 젬머링으로 다가가고 있었고, 가장 험난한 산악 구간인 뮈르추쉴라그(Murzzuschlag)와 글로그니츠 사이에서 불가능을 시험할 준비가 다 되었다. 철도 노선은 알프스의 깊은 협곡을 건너고, 때때로 바위가 구르는 높은 돌출로를 따라가야 했는데 이런 곳에는 눈사태로부터 선로를 보호하기 위한 피막 또는 방호벽을 건설해야만 했다. 1단계 또는 2단계 교량과 주랑 및 터널 등이 연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종류의 공사는 이전에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다. 독일어와 체코어, 이탈리아어로 말하는 수천 명의 건설 인부들이 황야의 오두막집에서 지내야 했다. 콜레라나 발진티푸스에 걸리면 마땅한 치료제도 없는 때라, 700여 명의 희생자들이 ‘역병’묘역에 묻혔다. 정상의 터널을 건설할 때는 9개의 공사용 수직갱(shaft)을 산 밑으로 뚫어 공기를 단축했는데, 다이너마이트도 아직 발명되지 않았기에 인부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곤 총포용 화약과 수동 드릴, 그리고 그 장비들을 운반하는 말들밖에 없었다.
1434m 길이의 정상 터널이 한창 건설되고, 여기저기에서 최초의 구배 선로가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기관차가 과연 저 가파른 선로를 오를 수 있을 것인가? 1820년대 조지 스티븐슨이 대담하게 차트모스를 건너 리버풀에서 맨체스터까지 철도를 건설할 때처럼 의심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1829년의 레인힐에서와 같이 유럽의 가장 유능한 엔지니어들의 능력을 시험할 경기를 개최하기로 했는데, 젬머링 철도의 급경사를 극복할 기관차 제작자에게 2만 두켓(ducats)의 상금이 걸렸다.
1851년 가을에 개최된 이벤트는 22년 전의 레인힐 경주와 아주 유사했다. 조심스럽게 고른 시험선 구간은 아이크버그(Eichberg) 근처 40 대 1의 오르막이었는데 4대의 기관차가 나섰다. 뮌헨의 마페이가 만든 ‘바바리아(Bavaria)’, 벨기에의 ‘세랭(Seraing)’,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비너-노이슈타트(Wiener-Neusta
dt)’와 ‘빈도보나(Vindobona)’였다. 이 기관차들은 140톤의 짐을 끌고 레일에 모래를 뿌리지 않으면서 적어도 11km/h의 속도로 경사를 올라가야만 했다.
기관차 4대 모두 조건을 충족시켰고 ‘바바리아’호가 우승을 차지했으나, 4대 모두 약간의 결점이 노출되었기에 여기에서 얻은 경험을 살려 다섯 번째 기관차가 제작되었다. 설계자인 그라츠의 기계공학 교수 이름을 따 ‘젬머링 기관차, 엥거스 시스템(Engerth System)’ 이라고 분류된 이 다섯 번째 기관차는 32량이 제작되어 노선을 개통할 때 열차를 끌었다.
첫 여객열차가 운행된 1854년 7월 17일은 게가의 날이었다. 기차로 알프스를 넘는 기술의 승리 현장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수천 명이 모여들었다. 온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젬머링 철도를 통과하는 개통 열차에 탄 느낌은 그 어느 것과 비견할 수 없는 경험이었으리라. 이날은 교통의 역사에도 기록될 날이었다. 이 업적 이래 철도 노선은 어떤 높은 산의 장벽도 건너거나 터널로 뚫고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까지 평평한 땅에만 적합하다고 간주되어왔던 철도가 마침내 높은 산을 정복한 것이다!
철도가 놓이기 전 가파른 산악 길을 힘겹게 올라가는 말들에 의존했던 이 협로의 교통량은 1857년 비엔나에서 라이바흐까지 그리고 아드리아 해까지 열차가 직통 운행되면서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가파른 산악 구간은 17km/h의 속도로 조심스럽게 운행되었으며, 개통 후 큰 사고 한 번 없이 안전하게 운영되면서 이후 건설된 모든 산악 철도의 모델이 되었다. 오늘날도 젬머링 철도는 디젤 열차로 건설 당시보다 3배의 속도로 정기 운행 중이며, 1998년 UNESCO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우리나라의 백두대간을 넘는 태백선과 영동선도 최대 33 대 1의 오르막(30/1000 구배)으로 건설되었고, 이렇게 가파른 구간은 5200마력의 전기기관차 2대가 약 1200톤의 화물차를 견인하면서 30km/h의 속도로 조심스럽게 내려오고 있다. 선로가 이슬에 젖어 미끄러울 때 기관차의 살사장치를 통해 레일 위에 모래를 뿌려 마찰력을 높이는 방법도 철도의 초창기 시절부터 전해온 것이다. (글_김천환 코레일 여객사업본부장)

* 이 글은 '철도의 이해'라는 코너로 KTX매거진에 연재된 총 8편 가운데 2008년 7월호 실린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