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이야기

세계 최초의 지하철

녹색열매 2010. 4. 2. 09:28

섹션 오피니언 > 등록일 2008-09-16
작성자 홍보실 (admin)
세계 최초의 지하철
그리고 전기철도의 등장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았던 최고의 도시 런던. 시 외곽에 자리 잡은 6개의 기차역과 도심을 연결하는 마차 때문에 심한 교통 체증에 시달리자 1863년 지하철을 개통한다. 역과 역 사이를 연결하고 도심을 순환하는 지하철은 큰 인기를 끌었고, 이후 지하 깊숙이 터널로 건설하면서 때마침 실용화 단계에 접어든전기철도 방식을 채택하게 되었다. 기술의 발달에 따라 전기철도는 지하철이나 산악철도에 우선적으로 채택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러 고속철도를 이끌고 있다.

영국 철도의 황금기
“철도 도입 초기의 몇십 년 만큼 우리 삶의 방식이 그토록 짧은 기간에 그렇게 획기적으로 바뀐 시기는 없었다”고 아서 엘톤(Arther Elton)은 1945년 출간된 <영국의 철도(British Railways)>에서 회고했다. “철도 도입 전에는 감히 나설 생각을 못했던 수백만의 사람이 여행을 떠났다. 철도가 없었다면 저렴한 인쇄물의 대량 유통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도시민의 식생활도 변했는데, 철도로 인해 고기와 채소의 가격이 처음으로 대다수 도시 거주자들이 구입할 수 있는 수준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철도는 급속히 최대의 고용주가 되어 수많은 일자리를 제공했다. 철도는 수출품을 항만까지 값싸게 수송함으로써 19세기 영국 무역을 이끌어냈다. 철도는 영국의 국회의원들이 지역구에 오가는 시간을 며칠에서 몇 시간 단위로 단축시켜 정치체제를 바꾸어놓았다. 철도는 농업을 변화시켰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자 철도의 성공은 대승리가 되었다. 새로운 세대들은 영국의 파워를 넓은 세계에 확립시킬 새로운 수단으로 철도를 인식했다. 이제 철도 건설에는 더 이상의 장애가 없었다. 높은 산도 넘을 수 있었고, 넓은 강도 다리를 놓거나 터널을 뚫어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로 6개의 철도역이 있던 런던은 1850년대에 이르러 정작 도시 한가운데에서 심한 교통 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세계 최초의 지하철, 런던 메트로폴리탄 철도
런던의 도심은 철도 도입 이전에 이미 상업지역으로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런던을 각 지방으로 연결하는 주요 간선 철도역은 비싼 도심을 벗어나 외곽 지역에 종착역 개념으로 건설되었다. 따라서 많은 여행객들이 런던브리지(London Bridge), 유스톤(Euston), 패딩턴(Paddington), 킹스크로스(King's Cross), 비숍스게이트(Bishopsgate), 그리고 워털루(Waterloo) 등 런던 외곽의 6개 철도역과 도심 사이를 승객용 마차(cab)나 승합차(omnibus)를 이용해 오가야 했기 때문에 교통량이 넘쳐난 것이다.
이미 1830년대부터 런던의 도심과 간선 터미널 역 사이를 잇는 지하철도를 건설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지만 교통 체증 문제가 심각해진 1850년대가 되어서야 이러한 계획이 진지하게 검토되었고, 마침내 1854년 런던 서부 간선역인 패딩턴 역에서 북쪽의 킹스크로스 역을 거쳐 화링돈 가(Farringdon Street)까지 지하철 건설을 승인하는 의회 법안이 통과되었다.
건설 당시 런던 지하철을 견인하는 동력원은 증기기관차였기 때문에, 지표면까지 연결되는 효과적인 환기 장치가 필수적이었다. 증기기관차의 스팀과 연기를 내보내고 신선한 공기를 터널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선 곳곳에 환기용 수직구가 설치되었는데, 도심의 거리에 세워진 환기구들은 1.5m 두께의 콘크리트로 주택의 전면부와 유사한 모양을 갖추도록 하는 등 거리의 미관을 살렸다.
이렇게 증기기관차 운행을 고려해 초기 터널들은 대부분 선로가 지나는 지역을 모두 파내고 건설 후 다시 덮는 개착식(cut-and-cover) 공법을 사용해 건설했다. 이에 따라 건설 과정에서 넓은 지역의 교통을 차단할 수밖에 없었을 뿐 아니라 해당 지표면의 건물들을 헐어내야 했다. 때로는 도시의 하수도를 잘못 건드려 터널이 침수되기도 했다.
건설은 자금 부족으로 수년간 지연되었다. 당시 런던 시티의 사무변호사(Solicitor to the City of London Corporation)를 역임하고 있던 찰스 피어슨(Charles Pearson)의 각별한 지원이 없었다면 이 프로젝트는 추진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피어슨은 1840년대 중반부터 런던 도심에 지하철을 건설하자고 적극 건의해왔다. 그는 도심의 비위생적인 슬럼가를 허물고 슬럼가의 주민들을 도시 외곽의 새집으로 이주시키는 대신, 교외의 거주지에서 도심의 일터까지 새로운 철도로 통근할 수 있도록 하자는 계획을 주장했다. 지하철을 운영하는 일에는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는 지하철 개념을 뛰어넘어 진정한 비전을 제시한 인물로 평가된다.
1859년 그의 설득에 따라 런던 시티가 자금 지원에 나서 1860년에 수석 엔지니어 존 포울러(John Fowler)의 지도하에 건설이 재개되었다. 피어슨은 슬프게도 이 지하철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유지는 지하 철도망의 성장과 함께 계승되어 많은 도시민들이 쾌적한 교외로 이주했다. 1863년 1월 10일 세계 최초의 도시 지하철인 ‘메트로폴리탄 철도(Metropolitan Railway)’-오늘날 서울지하철공사의 새 이름인 ‘서울 메트로’도 메트로폴리탄 철도에서 비롯되었다 -가 개통되었다. 개통 후 2~3개월 만에 이 지하철 이용객 수는 일일 2만6000명에 달했다. 건설 당시에는 런던 서부 간선철도의 광궤 차량도 다닐 수 있도록 광궤와 표준궤의 복합 궤도로 건설되었지만, 1869년 3월에 이르러서는 광궤가 모두 사라졌다. 1864년에는 해머스미스와 패딩턴을 잇는 다른 지하철 노선이 개통되는 등 여러 노선이 계속 건설되었고, 1885년에는 런던의 내부 순환선이 완성되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이때까지 건설된 지하철은 증기기관차 운행을 고려해 통풍구를 많이 설치할 수 있도록 깊이를 아주 얕게 하여 지표면에서 불과 5m 아래에 선로가 놓였기 때문에 개착식 공법을 사용해야 했다. 내부 순환선이 완성된 1885년경에는 도심의 슬럼가를 허물고 재정비하는 것까지 목적으로 했던 초창기 지하철 건설 시기로부터 30여 년이 흘러 도심은 이미 상업지구로 발달했다. 따라서 선로가 지나는 지역을 모두 파내고 다시 덮는 개착식 공법을 계속 사용하는 것은 매우 곤란해져 새로운 해결책이 필요했다.
새롭게 제시된 해결책은 지상의 교통에 지장을 주거나 건물들을 허물 필요가 없도록 지하 깊숙이 터널로 건설하는 것이었다. 때마침 실용화 단계에 접어든 전기철도 방식을 채택하면 매연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터였다.
1890년 스톡웰과 킹 윌리엄 가를 잇는 노선으로 개통된 ‘시티&사우스 런던 철도(City&South London Railway)’가 바로 세계 최초의 ‘고심도 전기철도 방식 지하철’이다. 이 지하 전철은 지표면 아래 약 20m 깊이로 터널을 뚫는 공법으로 건설되었다. 뒤이어 개통된 런던 지하철들은 대부분 고심도 전기철도로 건설되었는데 1900년 7월 30일 개통된 ‘센트럴 런던 철도(Central London Railway)’는 승강장이 있는 역 구내의 단면이 둥근 원통형 모양으로 되어 ‘튜브(Tube)’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점차 튜브라는 별칭은 런던 지하철 모두를 가리키는 애칭이 되었으며, 이 고심도 지하철 튜브는 세계 주요 도시 지하철의 교본이 되었다. 오늘날 런던 지하철은 11개 노선을 따라 250개 역을 운영하며 영업 거리는 약 400km에 달하고 하루 승객은 약 425만 명에 이른다.
한편 영국 내에서 런던 외의 지역으로는 글래스고(Glasgow)가 튜브를 건설한 유일한 도시였는데, 특이하게도 1896년 개통된 이 튜브 순환선은 동력으로 고정형 증기기관을 설치하여 열차를 케이블로 견인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 케이블 견인 방식은 1935년이 되어서야 전기철도 방식으로 바뀌었다.

증기차의 매연을 해결한 전기철도의 등장
여기서 오늘날 지하철은 물론 고속철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용되고 있는 전기철도의 탄생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자.
전기는 전기뱀장어 등 생물체 전기나 정전기 현상 등으로 오랜 옛날부터 우리 인류에게 알려졌지만, 이 현상에 대한 본질적 이해는 18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시작되었다. 1791년 전기 자극으로 개구리 근육을 움직이는 해부 실험을 통해 신경세포에서 근육으로 전달되는 신호가 전기를 매체로 한다는 생체전기를 입증한 동물학자 루이기 갈바니(Luigi Galvani)에 의해 동전기(정전기에 대비하여 움직이는 전기, 즉 전류)가 발견되었다.
이 실험에 사용된 전기발생장치를 연구한 물리학자 알레산드로 볼타(Alessandro Volta)에 의해 1800년 묽은 황산 용액 속에 아연판과 구리판을 담가 화학반응으로 전기를 얻어내는 전지(batteries)가 발명되었고, 이 볼타 전지는 전기의 성질에 대한 안정적 연구뿐만 아니라 실용적 활용의 기반을 조성했다.
19세기 초 전기가 실생활에 활용된 최초의 사례가 전신(teleg
-raph)이었다. 전신기는 초창기 철도에 우선적으로 적용되어 철도 시스템의 신경 역할을 담당한다. 19세기에 철도는 첨단을 걷는 가장 큰 산업이었기에 무언가 새롭게 발명했을 때 철도에의 적용 가능성이 제일 먼저 검토되었다. 1834년 직류 전동기를 발명해 미국에서 특허를 받은 토머스 다벤포트(Thomas Davenport)도 전동기로 움직이는 기관차라는 개념적 모형을 만들어 전동기가 가져올 미래상을 알리고자 했다.
세계 최초의 전기기관차는 1837년 스코틀랜드의 발명가인 로버트 다비드손(Robert Davidson)에 의해 제작되었다. 아연-산 전지를 동력원으로 한 까닭에 ‘갈바니’라고 이름 붙인 다비드손의 전기기관차는 1842년 에딘버러-글래스고 노선에서 시험되었는데, 짐차는 아예 끌지 못하고 전기기관차만 시속 6.4km로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전지에서 소모되는 아연의 비용이 같은 출력을 지닌 증기기관차의 석탄 값에 비해 무려 40배나 비싸서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1879년 베를린에서 열린 무역박람회에서 베르너 지멘스(Werner von Siemens)는 오늘날 유원지에서 볼 수 있는 여객용 꼬마 전기열차를 선보였다. 이때 사용된 동력차는 레일 중앙에 전력 공급용 레일을 설치한 제3궤조 방식이었다. 지멘스는 1881년 5월 16일 베를린 근처 작은 마을(Groß-Lichterfelde)의 마차궤도(tram way)에서 세계 최초의 여객용 전기차를 시험선 개념으로 운행했고, 베를린 시내에 이 전기철도를 건설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전력원의 한계 등에 따른 전기철도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하지 못해 베를린에 전기철도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세계의 다른 도시들에서 전차 운행이 확산된 이후인 1902년이었다. 이렇게 전기철도의 실용화는 화학반응에 의한 전지의 한계를 넘어서 충분하고 경제적인 전력 생산 방식이 발명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직류발전기(dynamo)의 원리는 1831년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가 발명했고, 이후 여러 발명가가 개량해왔다. 마침내 1871년 제노브 그램(Zenobe Gramme)은 상업적 발전이 가능한 수준으로 직류발전기를 개량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그램은 1873년 비엔나에서 열린 산업 전시회에 참가하던 중 한 발전기에서 나오는 전류를 다른 발전기의 단자에 잘못 연결했는데, 이 발전기가 전동기처럼 회전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즉 발전기와 전동기가 사실은 같은 원리여서 회전자의 축을 돌려주면 전기가 생산되고(발전기), 반대로 회로에 전기를 넣어주면 회전자 축이 돌아가는 것(전동기)이었다. 이러한 원리를 사용해 오늘날의 전기기관차들은 가속 시 사용한 견인 모터를 감속 시에는 발전 제동기로 쓴다.
초기에 대규모의 전력을 생산하는 상업용 발전의 동력원으로 주목받은 것은 폭포수의 높은 낙차를 이용한 수차였다. 수력을 얻기가 힘든 곳에서는 석탄을 때서 얻은 증기력으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생산했다. 먼 지역에 전력을 보내기 위해서는 전압이 높을수록 유리한데 가정이나 산업 현장에서 사용하는 전압은 감전의 위험 때문에 적당히 낮아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변압기(transfomer)가 필요했다. 변압기는 유도전류를 사용하는 원리상 교류에만 가능했고 이에 따라 188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에디슨의 직류 진영에 맞서 테슬라와 웨스팅하우스의 교류 진영이 펼친 전류 전쟁에서 교류 진영이 승리하게 되었다.
1881년 나이아가라 폭포를 이용한 수력발전소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등 세계 곳곳에서 대규모의 전력 생산이 가능한 발전소가 들어섰고, 이에 따라 전기철도 실용화를 가로막던 장애가 사라졌다.
1888년에는 미국인 프랭크 스프라그(Frank Julian Sprague)가 발명한 트롤리 방식(trolley system)을 적용하여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에서 ‘리치몬드 유니온 여객철도(Richmond Union Passenger Railway)’가 시내 전차 운행을 실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종래의 마차 궤도 옆에 세운 높은 전주에 전차선을 매달아 트롤리로 전기를 공급받는 스프라그의 ‘시내 전차(electric trams/trolley cars)’는 이후 세계 여러 도시에 퍼져나가 마차를 대체한다.
철도에서는 당연히 터널이 많은 노선에서 전기철도 방식이 우선적으로 도입되었으며, 앞서 살펴본 대로 1890년 런던의 고심도 지하철 튜브에서 최초로 실용화했다. 이때 사용된 전기 공급 방식은 차량 지붕 위 터널 상부에 전차선을 설치하는 방식이 아니라 터널 측벽에 별도의 전기 공급용 레일을 설치하는 제3궤조 방식이었다.
간선에서 전기철도는 1895년 미국 ‘볼티모어&오하이오 철도’에서 볼티모어의 상업지역 인근을 통과하는 약 6km의 터널 구간을 전철화하여 이 구간을 지나는 열차를 전기기관차로 견인한 것이 효시다. 초창기 전기철도는 전철화 설비의 높은 초기 투자 비용 때문에 확산이 더디었고, 증기기관차의 매연이 크게 문제가 되는 터널 구간이 많은 철도 노선에 우선적으로 도입되었는데 대도시의 지하철이나 터널이 많은 산악지대의 철도가 그 대상이 되었다.
특히 전기기관차는 증기기관차에 비해 견인력이 매우 높아 경사가 심한 산악지역 철도에 적격이었고 산악지역은 수력발전을 위한 댐 건설에도 적합하여 스위스는 전 철도 노선을 전철화했다. 우리나라도 1973년부터 태백선과 중앙선 등 산악지대를 통과하는 산업선을 우선적으로 전철화했으며, 1974년에는 경인선과 경수선 등 지하철 1호선을 전기철도로 개통했다.
오늘날 수도권에는 코레일이 광역철도 노선으로 경부선 서울-천안 구간, 경인선 구로-인천, 경원선 청량리-소요산(위 세 노선이 지하철 1호선과 연결된 광역 구간임), 중앙선 용산-팔당, 일산선 지축-대화(지하철 3호선의 광역 구간임), 안산·과천선 남태령-오이도(지하철 4호선의 광역 구간임), 분당선 선릉-보정 등 7개 노선에서 147개역 약 284km 거리에 전동차를 운행하며 하루 약 240만 명을 수송하고 있다. 서울시 구간에서는 서울메트로가 4호선까지 117개역에 약 135km, 서울도시철도공사가 5호선에서 8호선까지 147개역에 약 152km 운행을 담당하며 서울시 전체적으로 하루 평균 약 500만 명을 수송하고 있다. 인천시 구간에서는 인천지하철이 23개역에 약 22km, 인천공항까지는 공항철도가 6개역에 약 40km 구간에 전동차를 운행하고 있다.

도시철도(지하철)와 간선철도의 구분
이쯤에서 도시철도(지하철)와 간선철도를 구분 짓는 운영 측면에서의 특징을 살펴보자. 도시철도는 출퇴근 등 도시 내 통근객을 대상으로 2~5km의 짧은 간격으로 정차역을 둔 까닭에 평균속도가 시속 50km 내외이며, 성능이 비슷한 열차들을 빈번하게 운행한다. 반면, 간선철도는 역간 거리가 길어 평균속도가 높고, 열차의 종류도 고속열차부터 화물열차까지 다양하게 운행한다.
또한 간선철도에서는 일반적으로 예약 시스템을 통해 여객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정하고 이용 가능한 열차를 선정해 좌석이 지정된 표를 구매한다. 개표구나 집표구의 기능은 단순히 안내를 위한 것이어서 생략 가능하고, 정당한 표를 소지했는지의 확인은 열차 내에서 이루어진다. 반면 도시철도(지하철)는 일반적으로 이용할 열차나 좌석의 지정 없이 타는 역과 나오는 역의 게이트를 통과하면서 게이트에 설치된 정보 시스템이 운임을 징수하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발표되는 교통 통계를 보면 도시철도(지하철)와 간선철도의 구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광역 철도를 포함한 ‘국철’과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지하철’로 분류하여 ‘공로’와 ‘해운’ 및 ‘항공’ 등 수송 수단별 이용 인원을 집계하여 ‘철도’의 수송분담률이 아주 낮은 것으로 발표하고 있다. 이는 매우 큰 오류로 잘못된 정책 판단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코레일의 광역 철도만 하더라도 하루 240만 명에 달해 간선 여객열차 이용객 하루 30만 명보다 약 8배 이상 앞서 숫자 비교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러나 간선철도의 이용객 수가 적다고 하여 중요성이 낮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수입 측면을 비교해보면 KTX를 포함한 간선 여객 부문이 광역 철도 부문보다 3배 이상 높다.
프랑스에서는 100km 이상의 간선교통과 근거리의 도시내 통근교통으로 교통시장을 구분하여 각각의 분담률을 구한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최근 여객열차가 정차하는 주요도시들을 대상으로 간선교통에 있어서 철도·고속버스·항공·승용차(자가용)의 여객수송 분담율을 조사한 결과, 전국적으로 철도의 분담율이 37.1%로서 승용차의 44.8%에 근접하였고, 고속버스 13.9%, 항공 4.2% 순으로 드러났다. 특히, KTX가 운행하는 서울-부산 간의 경우 철도의 분담율이 68.5%로 압도적이며, 항공 20.4%, 승용차 8.1%, 고속버스 3%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서울-대구 간은 철도의 분담율이 66.0%에 달하며, 승용차 24.9%, 고속버스 8.4%, 항공 0.7%순으로 조사되었다. 반면, KTX가 기존 호남선으로 운행하는 서울-광주 간은 철도의 분담율이 32.2%에 머물며, 고속버스 46.9%, 승용차 12%, 항공 8.9% 로 조사되었다. 거리가 160km로 경쟁이 치열한 서울-대전 간은 철도의 분담율이 39.9%, 승용차 43.8%, 고속버스 16.3%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장거리 구간에서 철도의 수송 분담율이 높은 것은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전체 차량 중 200km 이상을 주행하는 차량의 비중이 4.3%에 머물고 100km 이상을 합쳐도 15.2%에 지나지 않으나, 철도 여객의 경우 200km 이상의 여행객이 36%이고 100km 이상을 합하면 61.1%에 이른다는 수치로도 뒷받침 된다. 하루속히 우리나라 교통통계의 선진화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글_김천환 코레일 여객사업본부장)

* 이 글은 '철도의 이해'라는 코너로 KTX매거진에 연재된 총 8편 가운데 2008년 9월호 실린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