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이야기

영국의 식민지 경영을 위해 건설된 아시아 최초 열차 인도 철도

녹색열매 2010. 4. 2. 09:24

섹션 오피니언 > 등록일 2008-09-30
작성자 홍보실 (admin)
[기고]인도에서 개통된 아시아 최초의 열차
김천환 코레일 여객사업본부장
1853년 아시아에서 최초로 선보인 인도 철도는 식민지 철도의 전형을 보여준다. 영국이 식민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건설한 철도, 하지만 바로 그 철도를 통해 여러 부족국가와 종교적 갈등, 카스트제도로 인해
분열되었던 인도인들의 마음속에 민족적 동질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철도는 전후의 화해와 재건설에 막중한 역할을 담당한다.


영국의 식민지 경영을 위해 건설된 인도 철도
5000년이 넘는 역사에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인도였지만,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상륙한 이래 점차 강성해진 유럽 열강이 침략을 본격화할 때 이 아열대 대륙은 사실상 잠들어 있었다. 1600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인도에 진출한 영국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뒤이어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향료 무역의 독점권을 확보해나갔다. 캘커타에 인접한 벵골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1757년 벌어진 플라시(Plassey)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18세기 중엽부터 영국은 경쟁자인 프랑스를 제치고 본격적으로 인도 대륙의 식민지화에 나섰다. 당시 갠지즈 강 하류 유역의 비옥한 땅 덕분에 부유한 지역이었던 방글라데시가 막대한 재화를 수탈당했을 뿐 아니라 이후 영국이 중국에 수출하는 아편을 생산하는 양귀비 재배 지역으로 바뀌어 농산물 부족에 따른 기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으니, 식민지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좌우간 영국은 인도의 여러 부족 국가 간 주도권 다툼과 힌두교와 이슬람교 등의 종교적 갈등에 따른 분열 등을 이용해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인도 대륙의 대부분 지역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18세기 후반까지 인도의 교통 시스템은 사실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부락들은 서로 격리되어 있는 데다 평균 수명도 짧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다른 부락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심지어 짐마차같이 바퀴 달린 수송 수단이 없는 지역도 많았다. 그나마 몇 안 되는 도로도 영주들의 세력 다툼 속에 서로의 군대가 이동해 다니면서 파괴해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여행을 하는 위험을 감수하겠는가. 상인들이 수직 리넨 제품 몇 궤짝을 운송할라치면 2000루피(rupee)라는 큰 비용을 들여야 했다. 이러한 궤짝들을 등에 지고 나르는 버펄로나 낙타들은 흙길을 걷다가 때때로 우기에 생겨난 진흙 뻘 속으로 가라앉아 나중에 도로의 이정표와 함께 표백된 해골로 발견되었고, 옛 통일제국 시대 건설했던 도로를 유지 보수하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렇게 내버려진 도로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이 대륙을 식민지로 삼고자 하는 영국인들이었다. 1785년에 캘커타(Calcutta, 오늘날의 콜카타 Kolkata)에서 북서쪽 전선까지 군용 도로가 건설되었고, 다른 도로들이 뒤를 따랐다. 5년 후에는 영국의 정복지 팽창에 따라 이 전략 도로망이 약 5만km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는 인도 대륙의 대부분 지역이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지 스티븐슨의 로켓호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지 2년 후인 1831년, 인도에도 철도를 놓자는 아이디어가 당시 마드라스(Madras, 오늘날의 첸나이 Chennai)에서 열성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궤도만 도입되었을 뿐 짐차를 끄는 동력으로는 철마가 아니라 힘센 황소가 동원되었다. 10여 년이 지난 1845년에야 비로소 나중에 인도 총독이 되는 영국 정치가 댈하우지 경(Lord Dalhousie)이 본격적인 철도 건설 계획을 추진했다. 인상 깊은 대목은 독일의 프리드리히 리스트(Friedrich List) 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댈하우지 경도 아직 존재하지 않으나 언젠가 건설될 여객과 화물 수송을 위한 주요 간선망을 계획했다는 점이다. 그는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하기 유리한, 항구에서부터 내륙 깊숙이 들어가는 노선들을 제안했다. 캘커타에서 출발해 오늘날 파키스탄 펀잡 지방의 중심 도시인 라호레(Lahore)까지, 인도 북부 델리에서 봄베이(Bombay, 오늘날의 뭄바이 Mumbai)까지, 봄베이에서 마드라스까지, 남동부 해변의 마드라스에서 남서부 해변의 말라바(Malabar)까지 연결하는 간선망이었다. 여왕의 승인이 떨어지자 그는 3개의 회사를 설립하여 즉시 일을 시작했다.
1853년 4월 16일 오후 3시 30분, 봄베이와 타나(Thana, 오늘날의 테인 Thane)를 잇는 약 34km 선로의 개통 준비를 완료했다. 봄베이의 빅토리아 역에는 아시아의 첫 열차가 출발 대기하고 있었다. 열차는 400명의 선택된 승객들이 탄 4축 티크 목제 객차 12량과 이를 견인하기 위한 3대의 기관차로 구성되었다. 제1호 기관차는 ‘술탄(Sultan)’이라고 명명되었다. 오후 3시 35분, 긴 기적 소리에 이어 박수갈채와 인도인들의 환호성, 그리고 영국인들의 응원이 뒤따랐다. 기차가 출발하면서 영국인들의 토피(Topee) 모자와 인도인들의 터번이 공중에 던져졌고 타나까지 가는 선로 변 어디서나 열광적인 군중들이 기차를 보고 환호했다.
철도 개통의 의미를 깊이 인식한 사람들은 개통 열차를 타고 축하연에서 건배주를 마시며 영국 국가 ‘갓 세이브 더 퀸(God save the Queen)’을 부른 400명의 특권층만이 아니었다. 선로가 지나는 인접 마을들의 수많은 인도 사람도 철도가 식민 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순수한 군사적 용도를 훨씬 넘어선 의미를 가진 기업, 특히 기근이 닥칠 때 크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실질적 수송 수단임을 깨닫고 있었다. 어느 한 지방에 흉년으로 기근이 닥치면 인근 지방에 풍작이 들어도 수천 명씩 죽어가곤 했었다. 굶주려 허약해진 사람들이 인근 지방까지 걸어갈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철도로 많은 양의 식량을 재빨리 수송해 올 수 있게 되었으므로 기아의 두려움은 사라진 것이다.
철길 옆으로 나란히 놓인 도로들은 자동차의 시대가 도래되기 전까지 반복해왔던 과정을 따라 유지 보수를 못해 또다시 기능을 잃어갔다. 하지만 철의 네트워크는 크게 확장되었다. 파키스탄의 중심 도시 카라치(Karachi)에서 북쪽으로 아프가니스탄까지, 북부 벵골에서 히말라야 산자락까지. 실론(Ceylon, 오늘날의 스리랑카)에도 1867년에 선로를 개통했다.
여태까지 인도의 30만 부락은 녹색의 광야에 각각 고립되어 있는 30만 개의 섬이었으나, 기관차의 기적 소리가 잠들어 있던 섬 주민들을 깨웠다. 그들은 열차가 정기적으로 다니며 대량생산 제품들을 항구에서 내륙으로 실어 나르는 모습을 보았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노인들조차 이제는 열차로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봄베이에서 철도가 개통된 지 한 세대가 지난 1883년에 이르러서는 승객 수가 1억 명을 넘어섰다.

인도 독립 국가 건설 과정에서의 철도 역할
18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인도에 진출해 실질적 지배자로 군림한 영국인들은 경제적 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그 변화는 인도인들의 언어나 관습까지도 바꾸어놓을 만큼 본질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제도가 근대화되고 각종 관공서·재판소·학교 등이 생겨나면서 이에 필요한 인력의 양성도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다시 말해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현지 인도인들이 필요해졌다. 그 결과 서구식 교육을 받고 변호사·의사·교사 등의 직업에 종사하는 신중간 계층이 형성되었다. 물론 사회 조직의 최상층부는 영국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종 특권과 사회적 혜택을 누렸다. 차츰 신중간 계층의 인도인들은 자신들의 한계와 민족적 일체감의 필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과거 인도의 지배 세력이 나라의 주권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사실상 포기한 반면, 영국식 교육을 받은 이 신세대가 중심이 되어 반영 민족주의 운동을 이끌게 된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제1차세계대전 이후 인도 역사의 새로운 장이 시작되었다. 식민 통치를 묵묵히 견뎌왔던 수백만의 사람이 인도 민족주의 운동으로 각성하고 범국민적인 반영 운동을 전개해나갔던 것이다. 그 선두에는 교육받은 신중간 계층에 속한 간디(Gandhi)가 서 있었다. 영국 제품 불매 운동, 물레의 장려 등으로 상징되는 그의 무저항비폭력주의는 인도 전체에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인도인들은 조국애로 뭉쳐 본격적인 독립운동으로 나아간다.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 전국을 걸어서 다니기도 했으나, 가능하면 철도를 점점 더 많이 이용하여 여행 시간을 줄였다.
간디는 1883년부터 한 인도회사와 계약하고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남아프리카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첫 여정인 더반(Durban) 항에서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로 가는 열차에서 있었던 사건은 익히 알려져 있다. 열차의 차장이 잘 차려입고 1등석 차표를 지닌 젊은 인도인 변호사 간디에게 “유색인에겐 3등칸만 허용된다”며 내쫓았던 것이다. 이 경험은 그로 하여금 인도인으로서 정체성을 자각하게 하여 이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나중에 인도에 와서도 간디는 항상 3등칸만 이용했다.
바로 이 3등칸이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정도로 그가 지향했던 의도에 맞게 봉사했으니, 비극적인 카스트제도에 따라 수백 계급으로 나뉘어 있던 인도인들이 통일된 국가의식과 인간적 존엄성으로 단합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열차로 여행하는 인도인들은 불가촉천민과 접촉하는 것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없이 계층적 편견을 집에 버려두고 와야 했다. 왜냐하면 철도의 객실에서는 고위 카스트 계급이거나 천민 계급이거나 상관없이, 남성이냐 여성이냐의 차별 없이 동일하게 대접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백만이 넘는 3등칸 여행객들이 증가하는 교통량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인도가 각성해나가는 역사에서 국가를 건설하는 요소로서 철도가 맡은 역할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영국의 식민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건설되었던 바로 그 철도가 이제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무너뜨리려는 독립운동가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1939년 발생한 제2차세계대전에서 인도는 연합군의 편에 서서 적대적인 일본과 맞섰고, 모든 열차가 전쟁에 동원되었다.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일본군을 미얀마 정글에서 저지하기 위해 26개의 선로가 해체되어 침목과 레일이 전선으로 보내졌다. 독일과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약속대로 인도를 독립시킴으로써 무혈의 승리를 인정했다. 인도는 1947년에 주권국이 되었고 영국연방의 회원국이 되었으며, 다만 독립 과정에서 종교적 갈등에 따라 이슬람의 파키스탄과 불교의 스리랑카가 분리되었다.
전승국인 영국이 인도의 독립에 동의한 것은 인도인들의 반영 독립운동이 거세짐에 따라 정치 군사적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식민지 경영을 통해 얻는 이익보다 더 커져 손해를 보는 당시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군사적 지배를 포기하고 오히려 자유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는 편이 더 낫다는 판단도 중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 태어난 인도 공화국이 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나선 300만 명의 난민을 조치하는 등 국가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수송 부문의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시급했다. 몇 년간 바퀴가 달린 모든 것이 거의 부서질 때까지 달렸다. 이러한 전후의 화해와 재건설의 시기에 철도의 역할은 그 무엇보다도 막중했다.
공장을 지어 고용을 창출하고 빈곤 상태를 해결하기 위한 산업화가 5개년 단위의 국가 계획에 따라 추진되었다. 우선적으로 수송력 확보를 위한 프로젝트로서 노후화된 기관차 등을 대체하여 새로운 철도 차량을 제작할 수 있는 기지를 계획했고, 1948년 모델 도시로서 캘커타에 가까운 치타란잔(Chittaranjan)에 철도 타운을 착공했다. 석탄이 풍부한 벵골 지역이 가깝고, 수력발전소가 있는 댐에서는 더 가까워 차량기지와 여기에서 일할 사람들을 위한 집과 학교, 병원 등 신도시에 전기와 물을 공급해주었다.
처음에는 전쟁 후유증을 겪은 노후화된 기관차들을 고쳐서 복구하는 일이 가장 중요했지만, 1950년에는 열성적인 젊은 세대의 공학자들이 이 기지에서 제작한 첫 증기기관차를 선보였고, 3년 뒤에는 100대째를 생산하여 인도 철도의 100주년을 기념할 수 있었다. 초기에 여러 민간 회사들이 도입한 610mm와 762mm, 1000mm의 협궤와 1676mm의 광궤 노선들을 단계적으로 1435mm의 표준궤로 개량하는 등 인도 철도의 현대화는 지금까지도 현재진행 중이다. 오늘날 인도 철도는 약 160만 명의 직원이 6만3327km에 달하는 네트워크에서 4만5000량의 객차와 22만5000량의 화차, 8300량의 기관차로 하루 1만8000개 열차를 운행하며 매일 약 1700만 명의 여객과 200만 톤 이상의 화물을 수송하여 인도의 산업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 이 자료는 KTX매거진 10월호 '철도의 이해'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