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이야기

신세계를 연 철도 그리고 철도 차량의 발전

녹색열매 2010. 4. 2. 09:40

섹션 오피니언 > 등록일 2008-09-16
작성자 홍보실 (admin)
신세계를 연 철도
그리고 철도 차량의 발전
미국 철도는 산업화 과정에서 교통 수요 증가에 따라 도시들을 이어주는 교통 시스템으로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철도의 발전으로 인해 그때까지도 사람이 살지 않았던 황무지가 비로소 개척되었다는 점에서 유럽과 다른 역사를 갖는다.

철도가 도입될 즈음 미국의 상황
오랜 역사를 지닌 유럽의 마차길이 비교적 잘 발달된 것에 비해, 신세계 미국의 교통수단은 강과 호수, 운하 등 수로를 기반으로 발달했다. 대부분의 이주민들이 자연 상태의 수로를 따라 정착촌을 세웠고, 그 이후로 세월이 많이 흐르지 않았기에 도로는 형편없는 원시적 상태에 머무른 채 수로 연결망으로서 한정적 역할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정착촌을 연결하는 교통수단으로 당연히 수로 교통이 발달했으며, 화물뿐만 아니라 여객 운송도 배를 이용해 이루어졌다.
증기기관차가 견인하는 철도의 시대가 개막되기 20여 년 전부터 미국의 허드슨 강에서는 이미 증기선이 운행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수로가 없는 곳은 어떻게 했을까? 수로가 가까운 지역에는 말과 중력으로 움직이는 초기의 마차 궤도를 설치했으나, 내륙으로 조금만 깊이 들어가도 접근이 어려워 자연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
1830년 8월 25일, 피터 쿠퍼(Peter Cooper)라는 이름의 발명가가 볼티모어 인근 약 20km 거리의 복선 궤도 위에서 아주 작은 기관차를 선보였다. ‘엄지손가락 톰(Tom Thumb)’이라는 귀여운 이름이 붙은 이 꼬마 기관차는 20km를 1시간에 주파했다. 돌아오는 길에 유명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바로 옆 궤도에서 말이 끄는 궤도차가 이 꼬마 기관차를 추월해버린 것이다. 비록 말과의 경주에서 지긴 했지만 증기기관차의 가능성을 알렸다는 점에서 승리자는 바로 ‘엄지손가락 톰’이었다. 이 사건은 곧바로 1831년 볼티모어&오하이오 철도회사가 1829년 열린 영국의 레인힐 경주대회와 비슷한 기관차 경주대회를 개최하도록 이끌었고, 이 대회에서 우승해 4000달러의 상금을 탄 피니아스 데이비스(Phineas Davis)의 ‘요크(York)’호는 레인힐의 ‘로켓’호가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후 미국 기관차의 원형 중 하나가 되었다.
이 무렵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도 성공적으로 운행에 들어간 기관차가 있었다. 1830년 크리스마스에 141명의 승객을 태우고 출발한 사우스캐롤라이나 운하&철도회사의 ‘찰스톤의 최고 친구(Best Friend of Charleston)’호였는데, 1831년 6월 17일 불행한 사고를 당하게 된다. 한 승무원의 부주의로 인하여 운행 중 안전밸브가 열리지 않아 엔진의 보일러가 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기관차는 곧 재건되어 6개월 후 ‘불사조(Phoenix)’란 새 이름을 얻고 정기 서비스에 투입되었다.
이와 같은 성과로 미국에서의 철도 사업은 충분한 신뢰를 얻게 되었고, 자본이 뒷받침된 곳이라면 어디서든 철도 건설이 본격화되었다. 도입 초기에 땅 주인 등 여러 이해 관계자의 반대에 직면했던 영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철도가 황무지를 개척하고 흩어진 공동체를 연결해주는 고마운 존재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누구든 최대한 빨리 철도를 완공하기 원했기에, 노반이 충분히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궤도를 놓기 일쑤였다.
영국에서는 땅이 비싸고 노동력은 풍부했기 때문에 언덕이 있으면 깎고 낮은 곳은 성토하여 선로를 최대한 직선으로 건설했지만, 미국은 반대로 땅은 싸고 노동력은 귀해서 최대한 자연의 장애물을 피해 평탄한 곳을 고르느라 선로에 곡선이 많았다. 당연히 철도 건설비가 아주 저렴해서 단위 거리당 건설 단가가 영국의 5분의 1에 불과했고, 건설 속도도 매우 빨랐다.

미국식 철도 차량의 발전
영국식 차량은 기본적으로 마차를 개량한 형태로, 차축을 차체에 직접 고정시키는 방식을 채택했다. 그래서 굴곡이 심한 노선에서는 차축이 곡선에 따라 유연하게 움직이기 어려우므로, 선로를 가급적 직선으로 건설해야만 했다. 반면, 미국인들은 철도 이전 교통수단으로 마차보다는 운하선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객차도 운하선의 선실과 유사하게 중앙 통로 좌우에 의자를 배치할 수 있는 긴 차량을 선호했다.
따라서 미국의 기술자들은 굴곡이 많은 미국 노선에 적합하도록 차량의 축간 거리를 짧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차량의 길이를 길게 만드는 난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볼티모어&오하이오 철도회사의 엔지니어 로스 위넌스(Ross Winans)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1834년 그가 특허 신청한 ‘대차(Bogie)’가 도입되면서 미국 철도 차량의 특징이 되는 새로운 혁신이 이루어졌다. 대차란 곡선을 유연하게 달릴 수 있도록 한 쌍의 차축을 좁은 간격으로 견고한 틀(프레임)에 고정한 주행 장치로, 차체는 대차 위에 얹히는데 대차와 차체가 각기 자유롭게 회전할 수 있도록 대차의 꼭짓점에서만 회전 볼트로 차체를 받치는 구조로 조립되었다. 선로에 굴곡이 많아도 좁은 축간 거리를 가진 대차가 유연하게 주행했고, 대차 위에 놓이는 차체는 선로의 굴곡에 영향을 받지 않고 충분히 크게 만들 수 있었다.
이 새로운 기술 덕분에 미국식 객차는 길이를 영국식 차량보다 두 배 이상 늘릴 수 있게 되어 평균 9~12m, 길게는 18m에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객차가 운하선과 같은 크기로 커지자 객차 내부도 운하선의 선실과 유사한 형태로 설계되었다. 즉 객차는 중앙에 통로를 낸 커다란 방 하나로 구성되는데 중앙 통로를 중심으로 의자를 좌우에 배치하고 의자의 등받이를 움직여 방향을 전환할 수 있게 했다. 또 객차와 객차 사이는 통로로 연결하여 승무원이 지나다닐 수 있게 하여 현대의 객차와 같은 디자인이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선박을 연상케 하는 미국의 크고 넓은 ‘살롱식’ 객차는 기술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유럽에 바로 도입되지 못했다. 마차식 객차 구조, 특히 1등석 객차처럼 독립된 객실을 선호했던 유럽인들은 객실 가운데 통로로 사람들이 오가는 ‘열린 공간’ 구조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유럽에서 초기의 열차들은 화장실에 가거나 식사를 위해 중간의 적당한 역에서 한동안 머물다 가는 방식으로 운행되었다. 화장실 칸은 별도의 짐차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정차역에서 내려 화장실 칸으로 간 승객은 다음 정차역에 도착할 때까지 자기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불편을 견뎌야 했다. 승무원들은 각 객차의 승강대를 통해 객차와 객차 사이를 오가야 했는데, 열차가 달리고 있을 때는 당연히 매우 위험했다.
이러한 불편은 나중에 차량 한편에 좁은 복도식 통로를 내고 각 객실은 이 복도에서 별도의 문으로 들어가는 컴파트먼트 차량이 도입되기까지 지속되었는데, 이 컴파트먼트 차량은 중앙에 통로를 두고 툭 트인 살롱식 객차와 달리 각 객실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동시에 식당차나 화장실 등을 오가는 안전한 통로를 제공해주었다.

열차 속도의 증가와 공기 브레이크 장치 발명
객차와 화차가 크고 무거워짐에 따라 차량을 끄는 기관차의 성능도 좋아지고, 차량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궤도도 더욱 튼튼해졌다. 이와 함께 열차의 속도도 급속히 증가했다. 미국의 철도 엔지니어들은 밤잠을 설쳐가며 ‘1분에 1마일(1.6km)’이라는 슬로건에 매달렸는데, 마침내 1851년 5월 당시 대통령 필모어(Fillmore)가 머무르고 있던 내로우스버그(Narrowsberg)에서 제작자 이름을 딴 기관차 ‘스윈번(Swinburne) 71호’가 35마일을 정확히 35분에 내달려 평균 시속 60마일(96km/h)을 기록했다.
이렇게 열차의 속도가 높아짐에 따라 제일 문제가 된 것은 믿을 수 있는 브레이크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기관차는 증기력을 이용하여 브레이크를 작동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열차 사이를 잇는 연결기가 끊어지면서 객차가 언덕길로 굴러 내려 승객이 죽는 사고 등을 겪은 후 철도 기술자들은 열차 전체에 동시에 작동하는 브레이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각 객차나 화차마다 브레이크를 장착해야 했고, 차량을 많이 연결할수록 더 큰 제동력이 필요했다.
당시 열차에는 마차의 마부처럼 각 차량의 지붕마다 제동 인부(brake man)를 태우고 다녔다. 열차가 멈추어야 할 때면 이 제동 인부들은 객차나 화차 지붕 위를 뛰어다니며 차량마다 설치된 수동 제동기를 감았다. 그러나 열차의 운행 빈도가 늘고 속도가 빨라지자 이러한 수동 방식 적용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 문제는 1860년대에 들어서서야 젊은 미국 발명가 조지 웨스팅하우스(George Westinghouse)에 의해 마침내 해결책을 찾게 되었다. 1867년 21세의 나이에, 어느 터널 공사장에서 수백 미터 길이의 튜브를 통해 압축 공기를 사용한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 웨스팅하우스는 이러한 튜브를 기관차에서부터 제일 끝단 차량까지 각 차량마다 연결하고 기관차에서 보낸 압축 공기를 조절함으로써 전 열차를 한 대의 차량처럼 동시에 브레이크를 작동시키는 장치를 고안하여 첫 특허를 받았다.
그의 시제품을 본 전문가들은 이 놀라운 아이디어를 당장 시험, 적용하고 싶어 했다. 이 공기 제동 장치를 장착한 시험 열차가 피츠버그에서 스튜벤빌로 운행될 때 철도 간부들 사이에 이제 22세가 된 웨스팅하우스도 함께 타고 있었다. 다니엘 테이트라는 기관사가 운전한 열차가 높은 속도로 터널을 진입하는 순간, 때마침 터널 출구 쪽 건널목 레일 사이에는 짐마차가 끼어 있고 마부는 안간힘을 다해 말을 채찍질하고 있었다. ‘이젠 끝났구나’ 하고 생각한 기관사가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작동시켰고, 제동 충격에 그는 넘어졌지만 열차는 짐마차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여태까지 어느 열차도 그렇게 빨리 멈추지 못했다. 공기 제동 장치의 효과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시험 운행을 거쳐 개량된 웨스팅하우스의 브레이크는 4년 후 2281대의 기관차와 7254대의 객화차에 장착되었으며, 전 세계에 퍼져나갔는데 오늘날에 널리 쓰이는 독일의 크노르(Knorr) 제동 장치도 웨스팅하우스의 원리에 기반을 둔 것이다. 이제는 시속 100km로 달리는 열차가 600m 이내에 정지할 수 있다.

미국 개척 시대의 철도
미국의 초기 철도 개척 시대에 열차를 타는 것은 그리 안락한 여행이 아니었다. 열차가 갑자기 멈추고 “모두들 내리세요” 하는 외침이 들리면 승객이 모두 내려 언덕길을 올라가기 버거워하는 기관차를 함께 밀거나, 탈선한 차량을 레일 위에 다시 올리도록 힘을 보태야 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1840년대는 열차의 속도가 올라감에 따라 초기에 급하게 건설한 교량이 무너지는 등 사고도 연이어 발생하여 오늘날의 ‘안전 제일주의’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시대였다. 하지만 고립된 마을들을 쉽게 소통시켜주는 경이로운 철도에 대한 고마움이 컸기에 승객들은 이 정도의 위험과 고생을 기꺼이 감수했다.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에 철도가 놓임에 따라,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에 의해 조그마한 정착지들이 번성하는 도시로 바뀌어가는 놀라운 변화를 노인 세대는 물론 젊은이들도 목격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철도의 역사는 곧 미국의 역사와도 같았다. 고립된 지역에 사는 초기 정착민들에게 철도가 들어온다는 것은 경작지의 생산물을 내다 파는 출구가 마련되고 마을과 마을 너머로 거래 시장이 확장되는 것은 물론, 사회 공동체에 생명줄을 제공됨을 의미했다. 뉴욕에 도착한 이민자들은 불과 한 세대 전 포장마차를 이용해 길고도 험난한 서부로의 여정을 견디어내야 했던 시기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속도와 방법으로 내륙으로 이동해갔다. 정부는 이민자들의 서부 정착을 지원하기 위해 기차 티켓을 무료로 제공했고, 심지어 1850년에는 철도 인근의 땅 1에이커(약 4047m2)를 불과 1.25달러에 살 수 있게 했다. 황무지 상태의 전원 지대를 열고 사람을 정착시키는 데 철도의 역할은 무엇보다 막중했다.
영국에서의 철도는 산업 생산의 중심지를 마을과 항구들에 연결시켜줌으로써 이미 확장 중이던 제조업과 상업을 더욱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미국에서의 철도는 아직 대부분 농업에 의존하고 있는 국가 발전의 초기 단계에 도입되었다. 따라서 미국 철도는 흩어진 공동체들에 인구를 번성케 하고 국가를 하나로 묶는, 번영을 위한 길을 열었다. 철도가 곧 미국을 현대화시킨 것이다.
1840년대에는 3개의 간선이 서부로 나아가고 있었다. 뉴욕에서 오대호와 그 너머로, 볼티모어에서 세인트루이스로, 그리고 리치몬드에서 멤피스로. 북부에서 남부를 관통하는 노선으로는 시카고에서 멕시코 만을 연결하는 노선이 유명했다. 이미 완공되었거나 건설 중인 노선까지도 유기적으로 경제 순환을 위한 혈관망을 형성하며 매달 흐름을 가속시켰다. 매주 새로운 마을이 연결되었고 부지런한 지도 제작자도 철길의 빠른 진척을 따라잡기 어려웠다.

미국 서부를 연 철도
그러나 미시시피와 미주리 강까지가 한계였다. 그 강 너머로는 철도는 물론 도로조차 거의 없어서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었다. 미주리 강에서 서부 해안의 캘리포니아까지, 당시 ‘아메리카 사막’이라고 알려진 지역은 백인들이 거의 들어가보지 못한 야생 지대였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서부로 끌었다. 마침내 남북전쟁 와중이던 1862년 6월,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철도와 전신선 건설을 촉진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동쪽에서는 센트럴 패시픽(Central Pacific) 철도회사가, 서쪽에서는 유니온 패시픽(Union Pacific) 철도회사가 각각 복선 철도 건설을 맡아 중간 지점인 ‘그레이트솔트 호수(Great Salt Lake)’에서 만나기로 계획되었다. 선로의 양옆으로 각각 약 60m 폭의 땅이 철도회사에 무상으로 제공되었는데 철도회사는 향후 이 땅을 개발하거나 매각할 수 있었다.
여기서 잠깐 철도와 전신(Telegraph)의 관계를 살펴보자. 1830년대 중반 발명된 전신은 바로 철도에서부터 쓰이기 시작했는데, 1840년대 중반부터는 철도 노선을 따라 전신주를 함께 건설하면서 철도역과 역 사이의 신호 통신체계로 자리 잡아 사실상 철도 시스템의 일부가 되었다. 전신을 통해 열차 운행 정보를 교환할 뿐만 아니라 철도 전보를 주고받을 수 있어서 철도는 교통수단이면서 동시에 통신수단으로서 역할을 담당했다.
1863년 5월,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에서 총 길이가 무려 2826km에 달하게 될 철도 노선의 첫 침목이 놓였다. 눈으로 뒤덮인 시에라 산맥으로 올라갈 무렵 일당 2달러를 받던 일꾼들이 일당 4달러를 받을 수 있는 은광 일을 찾아 철도 건설 현장에서 이탈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대의 가장 큰 기업이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고심 끝에 철도회사는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주로 상점 점원으로 일하던 중국인 노동자들을 시험해보았다. 중국인들은 체구가 작아서 무거운 침목과 레일을 다루는 억센 철도 일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관을 깨고, 이들은 90kg에 달하는 자재들을 불평 없이 나르고 집단 작업에도 잘 적응했다. 게다가 일당은 1달러면 되었다. 수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이 멀리 중국 황하 유역에서 모집되어 이곳 철도 건설 현장에 참여했다.
하지만 넘어야 할 난관은 험난한 자연만은 아니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영토를 무단 침입당한 인디언들이 철도 건설을 막고자 투쟁했고, 결국 수많은 인디언들이 희생되었으며 야생의 버팔로 떼들도 건설 현장의 식탁 위에 오르는 등 그 수가 급속히 줄어갔다. 남북전쟁이 끝나면서 제대 군인들과 새로 온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현장에 합류한 가운데 철도 건설은 가속도가 붙어 하루에 1마일씩 뻗어나갔고, 심지어 하루에 10마일을 놓는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마침내 1869년 5월 10일,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전신으로 현장 중계하는 가운데 마지막 침목이 놓이고 기관차가 통과함으로써 미국의 동서가 이어졌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870년 5월, 최초의 대륙횡단열차가 조지 모티머 풀먼(George Mortimer Pullman)이 새로 제작한 8량의 차량에 129명의 승객을 태우고 보스턴을 출발했다. 풀먼은 1840년대의 침대차를 보고 마치 감옥과 같은 모습에 실망하여 선로 위의 호화유람선을 제작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는 1859년 스스로 ‘궁전차(Palace Cars)’라고 선전한 1등석 침대차를 만드는 데 성공하여 시카고에서 인기가 높았는데, 드디어 최고의 순간을 맞게 된 것이다.
이 최초의 호화판 대륙횡단열차는 정차하는 도시마다 크게 환영받았고, 심지어 철도 전신을 이용하여 열차 내에서 발간한 일간신문으로 소식을 알리면서 마치 250년 전 신대륙을 연 메이플라워호에 탄 것과 비견하며 새로운 땅 서부를 여는 기쁨을 만끽했다. 열차가 샌프란시스코에 당도할 때 무한한 경제적 부의 비전이 수평선을 가득 채웠다. 금문교에 도착한 승객들이 대서양에서 담아온 물을 태평양에 합수시킴으로써 “이제 동부 지역뿐 아니라 온 아메리카가 우리 집”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미국인들에게 일깨워주었다. (글_김천환 코레일 여객사업본부장)

* 이 글은 '철도의 이해'라는 코너로 KTX매거진에 연재된 총 8편 가운데 2008년 6월호 실린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