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이야기

영국을 달군 철도 광풍 그리고 독일 통일의 파트너 철도

녹색열매 2010. 4. 2. 09:44

섹션 오피니언 > 등록일 2008-09-16
작성자 홍보실 (admin)
영국을 달군 철도 광풍
그리고 독일 통일의 파트너 철도
1830년 개통된 리버풀&맨체스터 철도는 단순히 새로 선보인 교통수단만은 아니었다. 영국은 물론, 바다 건너
미국과 유럽이 ‘당대의 첨단 기술’ 철도의 출현에 열광했다. 철도 광풍으로까지 표현되는 영국 철도 발달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최전성기를 맞은 영국의 무역과 제조업에 놀라운 동력을 제공했다. 수십 개의 소영주국들로 쪼개져 있던 독일에서는 소영주국 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근대 통일국가의 초석을 다지는 강력한 파트너로서 정치·사회적 변혁을 불러왔다.

영국 전 지역으로 확산된 철도
1830년 개통된 리버풀&맨체스터 철도는 즉각 국가적 모델이 되었다. 바다 건너 미국과 프랑스 등 다른 지역에서도 철도의 이용이 시작되었지만 유럽의 거대한 두 상업도시를 연결한 리버풀&맨체스터 철도만큼 새로운 교통수단이 지닌 잠재력을 여실히 보여줄 수 있는 사례는 없었다. 하지만 이 철도는 단지 45km에 불과했다. 다음 단계는 이 성공적인 경험을 살려 훨씬 멀리 떨어져 있는 대도시 간 교통 수요를 감당하도록 주요 간선에 적용시키는 것이었다. 수도 런던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사우샘프톤, 서쪽으로는 브리스톨, 북쪽으로는 영국 제2의 도시로 발전하는 버밍햄을 거쳐 리버풀&맨체스터 철도까지 연결하는 3개 노선의 철도회사들이 1832~ 1835년에 설립되었다.
본격적인 간선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여태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복잡한 문제들을 극복해야 했지만 1842년에는 이 세 노선이 모두 완공되었고, 여기저기 추가된 철도 노선을 포함하여 영국 전체의 철도 연장 거리는 오늘날 우리 한국 철도의 영업 거리와 유사한 규모인 약 3200km에 달하게 되었다.
영국의 철도는 모두 민간회사들의 손으로 건설된 민영 철도였다. 1842년만 해도 총 50개에 달하는 회사가 참여하고 있었다. 영국 정부는 사유재산권 보호와 공중의 안전을 위하여 철도사업 시행자에게 몇 가지 제한을 가하는 것 이외에는 전혀 나서지 않았다. 제한을 가한 이유는 당시 철도가 꽤 위험한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기관차는 폭발하거나 충돌할 수도 있는 커다란 동력원을 지닌 기계였다. 선로 인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죽거나 부상당하는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도입 초기부터 철도는 전직 육군이나 해군 장교들의 엄격한 지도하에 철도 직원들이 지시 명령에 복종하고 정해진 규칙에 따르도록 훈련시키는 한편, 아주 자세하게 각종 안전 규칙들을 채택하였다. 초창기부터 철도는 오늘날의 ‘해병대 정신’처럼 독특한 ‘철도인 의식(esprit de corps)’을 확립해 나갔으며 ‘철도인(railwaymen)’은 영국 사회에서 뚜렷이 구별되는 독특한 존재가 되었다.
철도 건설은 많은 돈이 드는 사업이었다. 땅값은 높았고, 법적 절차를 거치는 데 드는 비용도 비쌌으며 기술자들이 귀해져 프리미엄이 붙었다. 충분한 시간과 경험이 있었다면 피할 수 있었을 낭비도 많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시간’이 부족했다.
일단 어느 철도 노선이 착공되면 모든 사람들이 이를 연장 건설하기 원했다. 도시와 마을들은 철도망에서 제외되어 동떨어질까봐 겁을 냈고 상공인들은 그들의 상품이 철도를 통해 더 빨리 더 싸게 배송되기를 원했다. 농부들은 철도가 농산물 시장에 가져오는 혁명적 변화를 실감하기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반대했던 땅 주인들도 철도가 가져다주는 혜택을 맛보고 적극 환영으로 돌아섰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철도를 더 앞서 건설함으로써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잡고자 했다. 1824~1826년, 1836~1837년, 그리고 1844~1847년 등 세 차례에 걸쳐 ‘철도 광풍(railway mania)’이라 불리는 투기적 열풍이 영국을 거세게 휩쓸었다. 그 열기가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1846년 1월 영국 의회에 정식으로 제출되어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철도 건설 사업이 815개, 총 거리 3만3600km로 총 예정 사업비는 당시 국가 1년 예산의 6배인 3억5천만 파운드에 달한다고 로버트 필 수상이 조심스럽게 발표할 정도였다. 결국 이 중 1만3000km 정도만 승인을 받았고, 그중 일부는 아예 착공도 못한 경우도 있었다.

민영철도 방식의 장단점 및
표준 궤간 제정

이와 같이 민간회사가 주도한 영국에서의 철도 발전은 상당히 낭비적인 면을 지녔고 때로 투자자를 거덜 낼 만큼 투기적 사업이기도 했지만, 상대적으로 유럽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빨리 성장했고 효율성도 높았다. 1850년을 기준으로 영국 철도의 연장 거리는 1만600km에 달해 런던을 중심으로 국토 끝단에 있는 주요 도시들까지 대부분 연결되었으며, 독일과 프랑스를 포함한 나머지 유럽 국가들의 철도 연장 거리를 다 합친 규모와 비슷할 정도였다.
하지만 다수 민간 사업자에 의한 철도 건설과 운영 시스템의 큰 결점도 노출되었다. 당시 영국에는 약 75개의 민영회사가 철도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들 각각의 철도 간에 여객과 화물의 연결 수송이 원활치 못한 것이 문제였다. 여러 철도회사를 거치는 구간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각 회사별 승차권을 따로 구입해야만 했다. 이런 불편을 덜기 위해 전 구간을 1매의 승차권으로 발매하고 운송에 참여한 각 사별로 운임을 나누어주는 기관인 ‘철도정산소(the Railway Clearing House)’가 1842년에 설립되었지만, 가입 여부도 개별 철도회사 자유여서 주요 회사들이 모두 이 정산기관에 가입한 1865년까지 10여 년 동안은 부분적으로 여행객이나 화주의 불편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철도 궤도의 간격이 달라서 생긴 문제도 심각했다. 대다수의 철도가 리버풀&맨체스터 철도를 뒤따라 궤도 간격을 1435mm로 건설했으나, 런던에서 브리스톨을 잇는 서부 지역 철도(The Great Western Railway)를 중심으로 이에 인접한 잉글랜드 서남부 지역과 웨일즈 남부 지역 철도는 궤간을 2134mm의 광궤로 했다. 이렇게 별도의 궤간을 채택할 수 있었던 까닭은 공용 마차 궤도와 달리 해당 노선을 운영하는 철도회사가 자신의 궤도 차량을 직접 주문 제작해 배타적으로 운송 사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광궤 철도가 해당 지역 내에서만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던 초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으나 차츰 철도망이 확장되어 표준궤 구간과 만나게 되고, 운송 구간이 이러한 경계 지점을 지나야 할 때는 매번 여객과 화물을 다른 궤간의 열차로 옮겨야 하는 환승의 불편이 크게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1845년 영국 정부는 궤간 문제를 해결하고자 위원회를 조직하여 조사에 나섰으나, 보고서가 제출된 1846년의 시점에는 국가 전체의 철도 연장 3560km 중 광궤 연장이 440km에 달해 이를 모두 표준궤로 통일시키려면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더구나 광궤는 표준궤에 비해 건설비는 비싸지만 수송 능력 등에서 더 우수한 측면이 있었다. 따라서 정부는 광궤 노선이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지역적으로 제한을 가하고, 향후 영국 내에서 건설되는 철도들은 모두 표준궤를 따르도록 했다. 또 광궤 노선에는 표준궤 차량이 함께 다닐 수 있도록 제3의 레일을 까는 등 단계적으로 표준궤 전환 과정을 거쳤지만 1892년까지도 광궤 철도가 사라지지 않았다. 문제 해결 과정에서 교훈을 얻은 영국 정부는 당시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아일랜드에 철도를 건설할 때 제3의 궤간인 1600mm를 표준으로 삼도록 했다.
미국도 대부분의 철도를 민간회사가 건설했지만, 독일 등 유럽 대륙에서는 영국과 달리 국가 주도하에 철도를 건설했다. 독일, 프랑스 등 대다수 유럽 국가들은 영국과 같이 1435mm를 표준 궤간으로 채택했으므로, 1435mm보다 넓은 궤간을 표준으로 채택한 러시아와 스페인 국경을 통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영국의 경우와 같은 환승의 불편을 피할 수 있었다. 러시아는 1524mm를 표준으로 했고, 궤간 선택에 오랜 기간을 보낸 스페인은 1676mm를 표준으로 결정했다.

독일의 통일국가 형성과
리스트 교수, 그리고 철도

철도가 확산된 시기의 영국 상황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나폴레옹을 마침내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시켰고 트라팔가 해전 이후 온 바다를 지배한 영국 해군의 보호 아래 전 세계 식민지에서 원자재들이 영국의 항구로 수송되어 왔다. 영국 내부에서는 새 공장들이 산업 지역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으며 기관차 등 각종 철도용품을 포함한 공산품을 전 세계에 팔 수 있었다. 제조업의 팽창은 끝이 없어 보였으며 자본가들은 낙관적이었다. 돈은 넘쳐났고 투자할 기회도 풍부했다. 무역은 전성기를 맞고 있었고, 국민들의 사기는 드높았다.
그러나 독일에서의 사정은 매우 달랐다. 나폴레옹을 무찌른 후 열린 비엔나 회의(The Congress of Vienna)의 외교 게임에서 독일 지역의 수십 개 영주국들은 함께 ‘독일연방(The German Federation)’이라는 이름을 획득했다. 하지만 독일 연방은 아직 느슨한 다수의 영주국 연합체에 지나지 않았고, 각 영주국을 다스리는 영주들은 그 무엇보다 먼저 영주로서 지배 체제를 방어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다. 각 영주국 간의 경계에는 세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함부르크에서 오스트리아로 가는 여행객은 10개의 영주국을 거쳐야 했고 각 세관마다 다른 화폐로 제각각 다른 관세를 내야 했다. 각 주의 경계마다 사실상 ‘외국 땅’ 을 지나는 것과 같아서 쉴링을 탈러로 또는 탈러를 그로센으로, 굴덴을 크로젠으로 바꾸어야 했다.
튀빙겐대학의 경제학 교수였던 프리드리히 리스트(Friedrich List)에게 가난과 정치적 분열은 불가분의 관계로 보였다. 무역과 제조업이 융성한 곳에서만 인구가 번성할 수 있었다. 그 시기의 독일에는 제조업은 거의 없었고 대다수의 국민이 농업에 종사하며 자신이 가꾼 농산물에 의지해 살아갔다. 때때로 기근이 들었으며 1817년의 흉년에는 심지어 나무의 껍질까지 벗겨 먹어야 했다.
리스트는 작은 영주국 사이의 인위적 경계를 무너뜨리고 빠른 증기기관차로 달리는 장거리 철도가 도입되면 풍작이 든 지방의 농산물을 흉작이 든 지방에 보내 기근 위기를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그는 독일 연방 내 영주국들 간의 관세동맹을 옹호하고 완전한 정치적 통일을 주창했으나 1822년 ‘체제를 무너뜨릴 급진주의자’로 체포돼 강제 노동형을 치르고 추방당했다.
미국 망명 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리스트는 1833년 ‘독일 전체를 연결하는 네트워크의 기초로서 색소니 지방의 철도 시스템에 관하여’란 제목의 팸플릿을 발간했는데, 여기에 그는 몇십 년 내에 현실화될 예언적 내용을 담아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을 보였다. 그가 제시한 독일 철도망은 베를린을 중심으로 함부르크와 쾰른 등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6개의 방사형 간선 철도와 뮌헨을 연결하는 노선으로서, 오늘날의 독일 철도망과 거의 같았다.
독일에서의 첫 번째 철도는 뉘른베르크(Nurnberg)에서 퓌트르(Furth)에 이르는 노선으로, 국왕의 이름을 따 ‘루트비히 철도’라고 명명되었으며 1834년 2월 국왕의 승인을 받았다. 정부가 영국으로부터 레일 수입을 금지하는 보호관세를 매김에 따라 영국 뉴카슬에서 구한 3m 길이의 레일 샘플을 독일 내 압연 공장으로 보내 복제하도록 했다. 기관차는 스티븐슨에게서 공급받았지만 짐차(wagons)들은 독일에서 제작되었다.
마침내 노선이 완공되고 ‘아들러(Der Adler : The Eagle)’라고 명명된 기관차가 분해된 상태로 수송되어왔다. 책임자는 윌슨이라는 이름의 영국인 기관사였는데 독일어는 한마디도 못했지만 맡은 일이 중요했기에 월급은 중역보다 높았다. 윌슨은 8개월 예정으로 이곳에 왔지만 독일어를 배우고 지역의 유명 인사가 되어 독일 친구들과 사귀며 27년을 보냈다.
루트비히 철도는 1835년 개통 첫날부터 그 이전의 어떤 교통수단보다 높은 인기를 끌었다. 1837년 12월까지 하루 평균 1280장의 승차권을 팔았고, 주주들에게 20%의 높은 배당을 줄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가장 낙관적인 사람도 이 철도가 첫해 성취한 것 이상을 기대하지 못했었다”고 썼다.
1834년 경제 통합체로 향하는 첫 단계로 ‘독일 관세동맹’이 프러시아를 비롯한 7개 영주국 사이에 체결되었다. 철도와 관련해서는 베를린에서 리스트의 철도망 계획이 서서히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1837년 드레스덴에서 라이프치히까지, 1년 후에는 포츠담에서 베를린-젤렌도르프까지 철도가 개통되었다.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철도회사들이 설립되었고 철도 열풍이 급속히 번져갔으며 독일 자체의 기관차 제작 산업도 발달하여 헨셀(Henschel), 보르지히(Borsig) 같이 나중에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는 회사들도 나타났다.
이러한 철도의 눈부신 발전을 주의 깊게 지켜보던 정부는 확실한 통제의 수단을 찾고자 했다. 1838년에 프러시아는 철도법(Prussian Railway Act)을 제정했는데, 이를 통해 민영철도의 회계감사권과 상설 담당관청을 통한 감독은 물론, 개통 후 30년 이내 국가에서 사들일 권리까지 갖도록 하여 궁극적으로 철도를 국유화할 가능성까지 확보했다. 당연히 건설 승인 과정에서는 노선, 건설 기간, 철도 차량의 규격, 그리고 안전기준을 만족시키도록 했다. 군사전략적 측면에서 위급 상황 시 대규모의 군대와 보급 물자를 철도만큼 빨리 수송할 수단이 없었기에 국가는 민영 철도를 사들이는 한편, 새로운 노선의 건설에도 정부 자본을 적극 투입했다.
이렇게 전략적 고려하에 건설되었지만, 철도가 사회공동체의 실질적 소통 수단으로서 역할을 다하였음은 물론이다.
1845년까지 독일에 놓인 철도 연장은 약 3000km에 달했다. 민영 철도들은 이익을 좇아 인구가 밀집한 상업 지역에 집중되었고, 바덴 등 일부 영주국에서는 국영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와 같이 철도는 급속히 일상생활의 일부분이 되었으며 철도회사에 취직하여 철도인이 되는 것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초창기부터 철도는 우편마차를 대체하여 편지와 소포를 나르는 데 사용되어 운송 수단을 넘어 통신 수단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마침내 1846년, 독일연방 경계 내에 위치한 철도회사들은 ‘독일철도연맹’을 결성하여 한 영주국에서 다른 영주국으로 통과하는 열차 운행 시 내는 운임과 승무원 등을 통일시켰다. ‘영주국 간의 경계가 곧 국경’이라는 개념을 낡은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베를린에서 뮌헨으로 가는 열차에서 프러시아 승무원과 교대한 바바리아 승무원이 유니폼도 달리 입고 “Guten Tag!”이라고 인사하는 대신에 “Gruss Gott!”라고 한다면 마치 다른 나라로 여행하는 것 같지 않겠는가? 역사가 트라이츠쉬케(Treitschke)는 “철도로 인해 영주국들의 경계는 이동을 저지하는 권력을 잃어버렸고, 과거의 라이벌 관계는 잊혀졌으며, 독일인들은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기쁨을 발견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1870년대 비스마르크(Bismark)가 철도의 정치·군사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독일의 모든 철도를 국유화하여 단일한 국영철도체제로 만들려고 노력했던 것은 철도가 독일 통일의 강력한 파트너로서 정치적 장막 너머에서 정치와 상관없이 착실히 영주국 간의 경계를 허물어왔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글_김천환 코레일 여객사업본부장)

* 이 글은 '철도의 이해'라는 코너로 KTX매거진에 연재된 총 8편 가운데 2008년 5월호 실린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