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이야기

세계의 철도가 탄생하기까지 도전과 좌절

녹색열매 2010. 4. 2. 09:58

섹션 오피니언 > 등록일 2008-09-16
작성자 홍보실 (admin)
철도가 탄생하기까지 도전과 좌절
그리고 희망의 역사
16세기 영국의 탄광들은 석탄을 갱에서 가까운 강이나 수로까지 운반하기 위해 목재 레일을 깔았다. 탄광에 고인 물을 퍼내는 펌프를 개량하는 과정에서 철도의 또 다른 상징인 증기기관도 태어났다. 궤도와 증기기관차가 결합한 철도라는 놀라운 수송 수단이 세상에 선보이기까지 프랑스와 미국, 영국에서는 수많은 도전과 좌절, 그리고 새로운 도전이 이어졌다.


철도의 조상, 탄광선
철도가 일반 도로와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궤도(track)가 있다’는 점에 있다. 또 이 궤도 위를 기차가 달리는 수송 수단을 철도라고 한다면 궤도와 기차 모두 탄광에서 비롯되었다.
탄광에서 캐낸 석탄이나 광석을 밖으로 운반하는 일은 골칫거리였다. 울퉁불퉁하고 질척거리는 바닥 때문에 운반차의 수레바퀴가 진창에 빠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중세 북부 유럽의 광부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궤도를 설치했다. 갱이 무너지지 말라고 천장과 측벽을 받치던 갱목을 자연스럽게 바닥에도 깐 것이 목재 레일의 시초가 된 것이다. 16세기에 이르러 영국에서는 광산업이 번창하자 이러한 목재 레일을 갱내만이 아니라 갱 입구에서 가까운 강이나 수로까지 연장해서 깔았다. 석탄이나 광석을 실은 수레는 레일을 따라 중력의 힘으로 굴러 내려갔다가 말에 이끌려 되돌아 올라왔다. 이렇게 중력을 이용한 마차 궤도는 약 200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영국에서 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탄광선은 중부 노팅햄(Nottingham)에 있는 울라톤(Wollaton) 언덕의 탄광에서 트렌트(Trent) 강 수로까지 연결하는 선이다.
한편, 철도의 또 다른 상징인 기차를 움직이는 증기기관도 탄광에서 태어났다. 탄광을 파 내려가자면 물이 고이는데, 고인 물을 퍼내는 펌프를 개량하는 과정에서 1712년 토머스 뉴커먼(Thomas Newcomen)이 최초의 실용적 증기기관을 완성했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자면 대기압을 피스톤의 작동체로 사용하는 등 결함이 많았다. 1765년 제임스 와트(James Watt)는 뉴커먼의 아이디어를 보완해 상업적으로 성공한 새로운 동력원을 탄생시킨다. 실린더와 피스톤, 밸브 등을 개량해 증기의 팽창력으로 복동식 피스톤이 왕복 운동하고 이를 크랭크의 회전운동으로 전환하는 증기기관을 발명한 것이다.
증기기관은 탄광에만 머물러 있기에는 너무나 혁신적인 동력원이었다. 도시로 나온 증기기관은 사람과 동물의 힘에 의해 지탱되던 수공업을 대체해 기계류에 의한 생산, 즉 제1차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방직기, 공장, 제철소 등이 영국의 중부와 북동부 지방에 잇따라 들어섰고, 당시까지 사용되었던 목탄 대신에 석탄으로 연료가 대체되기 시작했다. 즉 도시화의 진전과 더불어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도시 주변의 숲이 줄어들면서 목탄의 공급이 달리게 되었으나 난방, 취사 및 증기기관을 위한 수요는 급증해, 석탄의 원활한 공급이 산업혁명의 핵심적 요소로 부각되었다.

철도 탄생 무렵의 교통 상황
석탄이나 광석은 무겁고 생산지가 제한되어 있어서 공장이 들어선 도시까지의 수송이 큰 문제였다. 육로는 오늘날과 같이 포장되어 있지 못해 비가 많이 내리는 영국의 날씨에서는 질척거리고 파이기 일쑤였기 때문에, 완만한 지형을 이용해 강을 따라 수많은 수로(canals)가 건설되었다. 탄광에서 수로까지는 중력을 이용한 마차 궤도로 나르고, 수로에서 작은 배에 옮겨 실으면 수로 옆에 난 길을 따라 말이 끌고 큰 강으로 나가 큰 배에 옮겨 도시가 있는 항구까지 가는 식이었다.
교통량이 늘어나면서 목재 레일은 나무 위에 철판을 까는 구조로 바뀌고, 이는 다시 철제 레일로 발달해갔다. 레일의 형상도 다양하게 실험되면서 높은 하중에 견디고, 오래가며, 차륜이 탈선하지 않는 형태로 발전했다. 예를 들어 도시의 마차 궤도는 고대 그리스의 홈으로 된 형태를 갖도록 차용했는데, 일반도로를 달리던 마차가 ‘트램(tram way)’이라고 불리는 궤도 위에서도 달릴 수 있도록 공용 방식으로 개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수송 수단으로는 늘어나는 교통 수요를 적절하게 감당할 수 없었다. 사료 값이 치솟고, 말은 귀해졌으며, 수로는 물이 부족하면 다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공장을 돌리는 새로운 동력원, 즉 증기기관을 말 대신 사용할 수 없을까?
미국인 풀톤(Fulton)은 와트의 증기기관을 이용해 증기선을 만들어 1803년 프랑스 파리의 센 강에 띄웠다. 4년 후인 1807년 증기선 클레몬트(Clermont)호가 미국 허드슨(Hudson) 강을 따라 뉴욕에서 알바니에 이르는 213km를 32시간 만에 운항했다. 그해 8월 17일 <뉴욕 미러(NewYork Mirror)지>는 증기기관이 가져올 미래의 변화에 대해 낙관적인 기사를 썼다. “지금까지 인간은 그가 살고 있던 곳에 굴이나 나무처럼 묶여 지내왔다. 증기기관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발전보다 훨씬 더 인류의 삶의 여건을 발전시킬 것이다”라고.
1815년 영국의 템즈 강에선 증기선이 정기적 서비스를 제공하기에 이르렀으나, 육지의 변화는 더뎠다. 탄광선에서는 언덕 위에 고정된 증기기관을 설치, 증기기관의 힘으로 로프를 감아 당겨 짐차를 끌어당김으로써 중력이나 말의 힘에 의존하는 한계를 넘어섰으나, 아직은 탄광에서 수로까지의 짧은 거리에 머물렀을 따름이었다. 육지에서는 대부분 수로 옆길이나 마차 궤도를 터벅터벅 걷는 말에 의해 수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내륙 교통 문제는 이제 밝아오는 산업혁명의 물결을 전파시키고 고조시키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증기기관차의 발명
1770년 프랑스의 공병 대위 니콜라스 조셉 퀴노(Nicolas Joseph Cugnot)가 파리에서 육군사령관에게 3륜 증기차의 시범을 보였다. 대포를 전선까지 끄는 데 사용할 목적으로 제작된 이 증기자동차는 무거운 보일러와 실린더가 앞바퀴에 얹어져 방향을 틀기 어려웠고, 보일러도 15분마다 물을 보충해야 했으며, 브레이크 장치도 갖추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시범 도중 언덕길에서 벽에 부딪혀 화재 사고가 나고, 뒤이어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면서 퀴노의 증기차는 병기 박물관으로 보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당시 퀴노의 시도는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바퀴 달린 차량에 증기기관을 장착해 달린 세계 최초의 증기자동차로서 이후 증기기관차의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같은 시대 영국에서는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의 공장에서 일하던 윌리엄 머독(William Murdock)이 ‘도로 위를 달리는 증기차’라는 아이디어에 매달려 있었다. 보수적인 와트는 움직이지 않는 고정형 증기기관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머독의 아이디어를 불신했고 “그의 놀라운 천재성이 너무 지나쳐 미치지나 않을까 두렵다”는 기록까지 남겼다. 1784년에 머독의 증기자동차 개발품이 완성되었다. 어느 날 어스름이 다가올 무렵, 이 발명품을 바깥 길에 옮겨 보일러 밑 예비 가열기에 불을 지피자 곧이어 물이 끓기 시작했고,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이 기계는 통제를 벗어나 어둠 속으로 질주해갔다. 조심하라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 저녁 산책에 나섰던 신부님이 김을 내뿜으며 쉭쉭거리는 이 괴물과 갑자기 마주치게 되었다. 쿵쿵거리는 가슴을 안고 신부님은 이 괴물을 뒤쫓고 있는 머독을 불러 세웠다. 이 괴물이야말로 바로 악마의 현신이 아니고 그 무엇이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로선 이 최초의 자동차가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기괴하게 보였을지 상상하기 무척 어려울 것이다. 이 기계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반응은 너무 좋지 않아서 머독이 이러한 ‘악마의 장난’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해졌으며, 그는 이 아이디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증기자동차의 세 번째 선구자도 운이 별로 좋지 못했는데, 그는 크레인, 컨베이어, 굴착기, 방직 및 방적을 위한 기계장치 등을 발명한 뛰어난 엔지니어인 올리버 에반스(Oliver Evans)였다. 이 미국인은 어느 날 증기기관차의 개념에 사로잡혀, 기관차를 레일 위에서 달리도록 하는 데 온 힘을 다할 것을 결심했다. 1797년 메릴랜드 주는 그에게 특허를 부여했고, 그는 기관차를 제작했다. 만약 충분한 재정 지원이 있었다면, 그는 ‘철도의 아버지’ 스티븐슨보다 30년을 앞서 역사를 새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반스는 가난했기 때문에 궤도는커녕 기관차만 만드는 것도 벅찼다. 아무튼 그가 필라델피아 시민들 앞에서 보인 시범만은 장관이었다. 궤도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에반스는 그 기계를 강의 준설기로 쓰도록 설계했다. 모여든 모든 눈들은 그 진기한 장치가 강을 향해 거리를 철걱거리며 나아가다가 강물 속으로 빠지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그 기계는 물에 잠겨 잊혀지게 되었다. 1805년 에반스는 증기선에 바퀴를 달아 세계 최초의 수륙 양용 증기차를 만들었지만 단순히 신기한 발명에 그쳤고, ‘움직이는 기관차’라는 모험스러운 사업에 투자하려는 자본가들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로도 에반스는 수많은 증기기관을 만들었지만, 모두 다 증기선이나 고정형 기관뿐이었다

철도의 아버지가 될 뻔했던 사나이
1804년 2월 25일 남부 웨일즈에 있는 한 광산(Merthyr Tydfil)의 광부들은 역사적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레일 위를 달리는 첫 번째 증기기관차가 10톤의 광석이 실린 수레를 끈 것이다. 하지만 이 증기기관차를 만든 리차드 트레비딕(Richard Trevithick)은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넘어갔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그 마차 궤도(wagon-way)가 지역 광산이 소유한 사유 궤도였기 때문이라 풀이된다. 아무튼 웨일즈 광산에서의 이 실험은 증기기관차와 철도 궤도의 결합이라는, 200년을 지속될 방식을 이룩했다.
트레비딕의 엔진은 수직 실린더로 구동되는 거대한 플라이휠이 장착되어 있었는데, 그 괴상한 모양새에도 불구하고 10톤의 짐을 끌고 시간당 13km의 속도를 낼 수 있었고, 이는 말 한 마리가 수레를 끌 수 있는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말을 구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사료 값은 더없이 비싸지는데, 제조업의 성장에 따라 교통수요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만 했다. 이 사태에 직면한 산업계는 말을 대체할 기관차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실험과 연이은 몇 번의 시도에서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기계의 무게가 당시의 궤도가 견딜 수 있는 한도를 넘어 너무 무거웠다. 트레비딕은 천성적으로 쉽게 낙심하는 사람이어서,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을 끌어내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대신 4년 후 런던의 한 거리에서 원형의 궤도 위에 새로 만든 기관차를 선보였다. 그는 “Catch me who can(날 잡을 수 있으면 잡아봐)”란 선전 문구를 내걸고 사람들이 한 번 타보는 데 1실링을 받았다. 그러나 또다시 기관차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궤도로 인해 탈선하게 되자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새로운 시대를 열 증기기관차’가 아닌, 그저 단순하고 기발한 발명품 정도로밖에 기억되지 않았다.
트레비딕은 유명한 증기기관 엔지니어로서 해외를 떠돌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나이 들어 1827년 무일푼으로 영국에 돌아와 철도가 영국을 변화시키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트레비딕이 아닌 조지 스티븐슨을 ‘철도의 아버지’라 부른다. 만약 트레비딕에게 쉽게 좌절하지 않는 끈기와 의지가 있었다면 철도의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글_김천환 코레일 여객사업본부장)
· 참고 서적 [The History of Railway](Erwin Berghaus)

* 이 글은 '철도의 이해'라는 코너로 KTX매거진에 연재된 총 8편 가운데 2008년 2월호 실린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