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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6.25전쟁 60년(판문점 공산주의자)<119>미소 짓는 중공군 대표

녹색열매 2010. 8. 31. 21:20


[6·25 전쟁 60년]
        판문점의 공산주의자들
        (119) 미소 짓는 중공군 대표

         

[중앙일보 유광종] 자신의 색깔을 좀체 드러내지 않는 스타일은 중국인들에게서 흔히 보인다. 안으로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지, 좋고 싫음의 호오(好惡)에 관한 표현이 아주 드물다. 그 대신 그들은 얼굴에 웃음을 잘 띤다. 표정을 무너뜨리면서 크게 웃어버리는 식의 파안대소(破顔大笑)는 찾아보기 힘들지라도 잔잔한 미소를 띠는 경우가 많다. 이름을 붙이자면 중국식 미소, 차이니즈 스마일(Chinese smile)이다.

살짝 입가에 맴도는 그런 미소는 사실 상대방 입장에서 볼 때는 더 당황스럽다. 그 속으로 어떤 마음을 담고 있는 것인지 더욱 알 수 없게 만든다. 늘 그런 미소를 띠고 있는 사람은 그래서 더 의뭉스럽게 보이면서 협상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혼란 상태로 몰아간다.

휴전회담 석상의 중공군 대표들이 그랬다. 그들은 상대방을 노려보면서 화가 난 표정으로 기 싸움을 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조용히 웃음을 머금고 있으면서 속으로는 기민하게 두뇌를 회전하는 그런 인물들이었다.



회담장의 공산 측 대표 중에서는 셰팡(解方)이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파리가 기어 다녀도 꼼짝 않고 나를 노려봤던 이상조와는 전혀 딴판이라는 인상을 줬다. 그는 말과 행동거지가 아주 신중했다. 그와 마주 앉은 사람은 로런스 크레이기 미 극동 공군부사령관이었다.

나와 이상조, 알레이 버크 제독과 장평산이 마치 ‘으르렁’ 거리는 듯한 모습으로 서로를 쏘아보면서 적대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던 것과는 달리 그들은 늘 웃었다. 크레이기 소장이 셰팡과 웃으면서 서로 인사를 하기도 했고, 덩화(鄧華) 또한 미 8군 참모부장 행크 호디스 소장과 부드러운 표정으로 대면했다.

셰팡은 특히 상대방을 자극하는 언사를 한마디도 구사하지 않았다. 어제까지 총구를 맞대고 싸움을 벌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점잖은 표정에 뜻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부드러움에서는 셰팡이 덩화에 비해 한 수 높았다.

셰팡은 정치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 전선에 뛰어든 중공군 사령부의 참모장이었다. 작전을 직접 수행하는 역할이 아니라, 각 전선의 상황을 살핀 뒤 최종적으로 공격과 수비 또는 진퇴(進退)를 조율하는 정치적 참모였던 셈이다.

그래서 그는 상황을 더 길게 봤다. 일본 육사를 졸업해서 그런지 외국의 상황에 대해서도 폭넓은 이해력을 갖췄다는 인상을 줬다. 그의 별명은 ‘강철 주둥이(鐵嘴)’였다.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동북지방에 있던 셰팡이 중국 대륙 최남단의 광시(廣西) 지방에 가서 그곳의 군벌들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모두 항일(抗日) 전선으로 나서게 한 공로를 세운 뒤 얻은 별명이었다.

덩화는 한국 전선에 뛰어든 중공군의 작전을 직접 구상하고 지휘했다. 중공군의 특징은 상대와의 담판을 또 하나의 전투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협상을 전쟁의 연속이라고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덩화는 실 전 지휘 경험을 바탕으로 휴전회담을 진두(陣頭)에서 이끌기 위해 중국 측 담판 대표로 나선 인물이다. 그런 점 때문에 덩화가 아군 측과의 협상을 전투적으로 이끌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 또한 셰팡처럼 늘 평온함을 잃지 않았고, 맞은편에 앉은 미군 대표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선에서 전투를 이끌면서 늘 듣고 체험한 이야기지만, 중공군은 북한군과 여러 면에서 달랐다. 그들은 민폐(民弊)를 끼치는 것에 극도로 민감했다. 그들이 한국 전선에 뛰어들어 여러 차례 국군과 미군을 밀고 내려올 때도 중공군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겼다. 중공군 지휘부는 일선의 장병들에게 한국의 일반 민가(民家)에 가능한 한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한국인 민가에 들어가 숙영(宿營)할 경우 몇 가지 원칙을 지켜야 했다. 집 안에 사람이 있으면 들어가서 자지 말 것, 숙영하기 전에 반드시 민가의 화장실을 청소해 줄 것, 민간인이 소유한 음식과 가구 등을 함부로 축내거나 손상하지 말 것 등의 준수 사항을 이행해야 했다.

북한군도 남침 초기에는 비슷하게 행동했다.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해 북한 지도부가 내렸던 명령이었다. 그러나 아군의 북진에 밀려 후퇴하던 무렵에 북한군은 돌변했다. 사납게 행동하면서 우익 인사들을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인명을 무참히 살상했다.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 또한 아주 난폭해졌다.

저들이 점령했던 서울 등 남쪽 지역에서 물러나 38선을 넘어 후퇴하던 때에 북한군은 민간인들로부터 상당한 공격을 받았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사람을 함부로 처단하고 민간의 기물을 파손하면서 막심한 피해를 주민들에게 끼쳤던 대가였다.

그에 비해 중공군에 대한 인상은 괜찮은 편이었다.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수뇌부의 엄명이 비교적 잘 지켜졌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장(戰場)에서 북한군과 중공군은 모두 맹렬하게 덤벼드는 전사(戰士)였음에 분명하지만, 전쟁 전체를 다루는 방법에서는 차이가 났다. 휴전회담 상대방의 한쪽인 북한군은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경색된 입장을 견지했지만, 다른 한쪽인 중공군은 늘 치고 빠지면서 민심까지 고려하는 유연한 사고를 유지했다.

파리가 온 얼굴을 기어다니는 것을 견뎌가면서까지도 강인함을 과시하려고 했던 북한군 이상조에 비해 미소를 띤 중공군 대표는 늘 미군에게는 화젯거리였다. 하루는 크레이기 소장이 내게 “중국어 한마디 가르쳐 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 =  유 광종  기자  /  블로그 http://blog.joins.com/ykj01/

출처 : 호림(sohn4303) : 손 국현
글쓴이 : 호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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