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재명사님 추모

황장엽, 망명~사망까지 남한에사실혼 아내와 아들 재산?를 남겼다.

녹색열매 2010. 10. 11. 18:50

황장엽, 망명 사망까지 남한에 사실혼 아내와 아들과 재산를 남겼다

2010.10.09 17:39 | 화제의인물들의애도함 | 녹색열매



 

황장엽, 남한에 사실혼 아내와 아들 남겼다

[데일리안] 2010년 10월 11일(월) 오후 03:31
[데일리안 신동규 기자]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전 비서(87)가 10일 별세함에 따라 국내에 남은 유족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경찰 관계자 측은 "평소 좌욕을 좋아하는 황 전 비서가 욕실에 들어가 나오지 않자 보안요원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죽어 있었다고 한다"며 "정황으로 봐서는 심장마비일 가능성이 높지만 정확한 사망 원인을 위해 면밀하게 조사할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다.

 

이어 관계자는 "이번 사안이 워낙 세간의 관심이 많고 중요한 사안이라 부검을 실시하는 것"이라며 "정확한 부검 결과가 빠르면 1시간 정도 걸린다. 결과가 나오는 데로 브리핑하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故 황정엽의 빈소는 풍납동 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됐고, 발인은 14일로 잡혀있다.

현재까지 외부로 드러난 고인의 가족으로는 수양딸 김숙향 씨(68·황장엽민주주의건설위원회 대표)가 유일하다. 그러나 황씨에게는 사실혼 관계인 부인(49)과 아들(11)도 있다고 <뉴시스>가 11일 보도했다.

이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1997년 입국 후 국가정보원 측이 추천한 비서 후보들 가운데 황씨가 직접 선택한 여성이 현 부인이다. 그녀가 낳은 아들(11)은 북의 위협을 우려, 캐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가 현지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다. 누구의 아들인지 한 눈에 알아볼 정도로 아버지를 빼닮았다.

하지만 황씨의 호적에는 이 부인과 아들이 올라있지 않다. 아들도 ‘황씨’가 아니라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부인은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남편 황씨와 아들을 돌본 것으로 알려졌다.

황씨는 또한 상당한 유산을 남겼다. 황씨의 사망 장소인 서울 논현동 안전가옥은 국가재산이 아니라 황씨 개인 소유라는 설도 있다. 황씨는 또 부인에게 이 안가 인근의 5층짜리 빌딩을 양도했고, 부인은 언니 명의로 건물 1층에서 대형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

◇ 11일 오전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장례식장에서 황씨의 수양딸인 김숙향씨가 분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황장엽, 국가안보 확립·북한 민주화에 헌신...국민훈장 추서” 2010-10-12 15:08

      행정안전부가 고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고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이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을 찾아 훈장을 직접 전달했다.
맹 장관은 12일 오후 2시께 황씨의 빈소를 찾아 영정
사진 앞에 훈장을 전달하고 유족인 김숙향씨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맹 장관은 “
고인은 북한의 실상을 국민과 세계에 알리기 위해 가족보다 7000만의 생명을 소중히 생각했던 분”이라며 “국가안보 확립에 기여하고, 북한의 민주화와 개혁ㆍ개방을 위해 헌신한 점을 인정해 훈장을 추서하게 됐다”고 말했다.
훈장 추서는 사안이 급하게 진행돼 국무회의에서 논의되지 않고,
전자결재 형식으로 추서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장지와 관련해서 맹 장관은 “현충원 안장은 확정되지 않았으나, 유족ㆍ장례위와 논의한 결과, ‘고향에 묻히고 싶다’는 고인의 뜻을 받들어 우선은 현충원에 안장했다 통일 이후에 이장할 수 있다”고 밝혔다.
맹 장관은 “
보훈처 안장심의위원회에서 결정할 사안이지만, 위원회가 유족의 뜻을 감안해 현충원에 안장할 것으로 본다”며 “생전에 정부가 고인의 신변안전을 책임졌던 만큼 사후에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 생각이다”고 현충원 안정에 대한 긍정적 검토를 시사했다.
장례 절차와 관련해 장례위 관계자는 “국장이나 국민장이 아니어서 정부가 지원할 법적 근거가 없지만,
정부지원을 건의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공동장례위원장으로 거론됐던 이회창 총재는 “공당의 대표가 위원장을 수락하는 것은 부적격하다”는 의견을 전해와 공동장례위원장은 박관용 전 국회의장, 노재봉 전 총리, 정희경 청강
학원재단 이사장 3명으로 확정이 됐다고 장례위는 전했다.
이태형 기자/thlee@heraldm.com

(서울=연합뉴스) 김귀근 기자 = 국가보훈처는 13일 오전 고(故)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국립현충원 안장 여부를 심의한 결과, 국립대전현충원 에 안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보훈처 관계자는 이날 "황 전 비서의 국립현충원 안장 여부를 심의한 결과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하는 등 국립묘지 설치.운영 법률에서 규정한 자격 요건을 갖춰 안장 대상자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황 전 비서의 안장식은 14일 오후 3시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거행된다.

현행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은 '국가나 사회에 현저하게 공헌한 사람(외국인 포함)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요건을 갖춘 사람'은 안장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법률의 시행령은 '상훈법 제12조와 제16조, 제17조 및 제17조의②~⑤까지의 훈장을 받은 사람', '훈장을 받을 수 있는 활동 또는 업적에 준하는 활동을 하거나 업적을 이루어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하게 공헌한 사람'을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요건을 갖춘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threek@yna.co.kr
부인은 유산 상속문제를 매우 걱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부인을 잘 아는 사람은 “황씨의 상속인은 수양딸이다. 황씨는 사후 자신의 재산을 일단 수양딸에게 넘긴 뒤 아들, 부인과 분배토록 약정서 같은 것을 작성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황씨는 13년 전 적지않은 돈을 갖고 온 데다 정부과 각계의 후원금, 특강료, 저작물 인세, 석좌교수 강의료 등으로 상당한 부를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산분쟁이 빚어질 개연성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편 고(故) 황 전 비서의 빈소에 상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숙향 씨(68)는 13년 전 황 전 비서가 한국으로 망명할 때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친서를 수차례 전달한 중개인으로 알려졌다.

또한 이날 <경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김 씨는 영문학 교수 출신으로 김철호 전 명성그룹 회장(72)의 여동생이다. 80년대 초부터 금강산 관광·개발을 추진해 온 김철호 회장의 대리인 자격으로 북경에 머무르며 북한 인사들을 접촉했고, 이 때 황 전 비서와 함께 망명한 김덕홍씨와 인연을 쌓은 것을 계기로 그들의 망명을 돕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황 전 비서의 망명 후 그를 도와 북한민주화운동을 함께 하면서 수양딸이 됐고, 황장엽민주주주의건설위원회 대표를 맡아왔다. 김씨는 가끔 안전가옥에서 혼자 지내는 황 전 비서를 찾아갔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황 전 비서와 함께 망명한 김덕홍씨는 장례식장을 찾지 않았다. 한 탈북자단체 관계자는 “김씨가 조화는 보냈는데, 조문하러 오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씨는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화해무드가 조성되던 2002년 미국에 가서 반 김정일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당시 국정원의 요청으로 미국을 방문하지 않은 황 전 비서와 사이가 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데일리안 = 신동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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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신동립 기자 = 황장엽(87) 북한 노동당 전 비서가 10일 별세했다. 동시에 ‘국내 유족’에게로 관심이 쏠리고 있다.외부로 드러난 고인의 가족으로는 수양딸 김숙향씨(68·황장엽민주주의건설위원회 대표)가 유일하다. 그러나 황씨에게는 사실혼 관계인 부인(49)과 아들(11)도 있다.

1997년 입국 후 국가정보원 측이 추천한 비서 후보들 가운데 황씨가 직접 선택한 여성이 현 부인이다. 그녀가 낳은 아들(11)은 북의 위협을 우려, 캐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가 현지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다. 누구의 아들인지 한 눈에 알아볼 정도로 아버지를 빼닮았다.

하지만 황씨의 호적에는 이 부인과 아들이 올라있지 않다. 아들도 ‘황씨’가 아니라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부인은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남편 황씨와 아들을 돌봤다.

황씨는 상당한 유산을 남겼다. 황씨의 사망 장소인 서울 논현동 안전가옥은 국가재산이 아니라 황씨 개인 소유라는 설도 있다. 황씨는 또 부인에게 이 안가 인근의 5층짜리 빌딩을 양도했고, 부인은 언니 명의로 건물 1층에서 대형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

부인은 유산 상속문제를 매우 걱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부인을 잘 아는 사람은 “황씨의 상속인은 수양딸이다. 황씨는 사후 자신의 재산을 일단 수양딸에게 넘긴 뒤 아들, 부인과 분배토록 약정서 같은 것을 작성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황씨는 13년 전 적지않은 돈을 갖고 온 데다 정부와 각계의 후원금, 특강료, 저작물 인세, 석좌교수 강의료 등으로 상당한 부를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산분쟁이 빚어질 개연성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reap@newsis.com
황장엽, 망명에서 사망까지

[노컷뉴스] 2010년 10월 10일(일) 오후 01:54
[CBS정치부 김주명 기자]

1997년 2월 12일 베이징에서 남북은 물론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베이징의 주중한국대사관 영사부에 북한 노동당 최고위층인 황장엽 비서가 망명을 신청한 것이다.

황씨는 주체사상에 관한 강연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뒤 중국을 거쳐 귀국하는 경로에 자신의 최측근인 김덕홍과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북한의 체제에 의분을 느껴 변혁을 도모하기 위해 망명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북한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한국행을 막아야 한다는 김정일의 지시로 중국측과 치열한 막후협상을 벌였다. 만약 이것이 여의치 않다면 황장엽을 중국에서 살도록 하고, 이것조차 안 되면 사살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우리 정부도 황씨의 망명 성사를 위해 중국을 상대로 첩보작전을 방불케하는 외교접촉을 계속했다. 김하중 전 통일부 장관이 장관특보로 급파됐다. 언론에 노출될 것을 우려해 중국인 복장을 하고 승용차도 바꿔 타며 중국 외교부 관계자들을 접촉했다.

난처해진 중국 정부는 황씨의 망명 의사가 확실한 것을 확인하고 황씨를 제3국인 필리핀으로 내보냈다.

중국은 황씨의 망명이 외교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우려해 황씨를 제3국에서 한달간 체류하도록 할 것을 요구했다.

대통령 외교안보 수석이었던 반기문 현 유엔사무총장은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친서를 갖고 필리핀 라모스 대통령을 만나 황 비서의 체류를 요청해 한달 뒤 황씨의 한국행을 성사시켰다.

◈ 실각 위기 속 한국행 선택
황장엽 비서가 한국 망명을 결심한 결정적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황씨는 주체사상과 관련해 김정일과 심각한 갈등을 겪으면서 숙청의 위기가 다가오자 한국행을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90년대 중반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주체사상에 대한 강연회나 세미나에 참석하던 황 비서는 96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주체사상 세미나에서 "주체사상은 (김일성 사상이 아라) 인간을 근본으로 한 인본사상이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황 비서는 이후 모스크바종합대학 연설에 대해 "나는 주체철학이 인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김정일에게도 여러 차례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내 얘기의 핵심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발언이 평양에 보고되면서 위험을 감지한 황 비서는 베이징에 나와 있던 김덕홍씨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1997년 1월 말 일본에서 열리는 주체사상 세미나에 참석한 뒤 귀국길에 베이징에서 전격적으로 망명을 선택하게 됐다.

◈ 망명 이후 반북활동
황 위원장은 망명 이후 대표적인 반북인사로 활동해 왔다. 이 때문에 북한은 여러 차례 황씨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황씨는 특히 김정일 체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을 해왔으며 최근에는 3대 세습에 대해 강도높은 비판을 해왔다. 그는 올 초 미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후계자로 알려진 김정은에 대해 "그까짓 녀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또 일본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김정일 체제가 김일성 시대보다 독재의 정도가 10배는 강하다면서, 북한이 자신을 반역자라고 하지만 반역자는 국민을 굶어죽게 하는 김정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북한은 여러차례 황씨를 암살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중앙지검과 국가정보원은 지난 4월 북한 정찰총국의 지령을 받고 위장 탈북한 김모(36)씨 등 2명을 구속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황 전 비서는 그러나 결국 북한 노동당 창건일인 10일 오전 9시30분 서울 강남구 논현1동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심장마비에 의한 자연사인 것으로 알려졌다.
jmkim@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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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황정일 공사 사망 2주기…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혹
 | 2009-07-29 16:51:30 인쇄하기


▲ 고 황정일 공사의 영정과 미망인(SOH/김경아)

[SOH] 고(故) 황정일 공사 사망 2주기를 맞아 유족들이 ‘국가가 황 공사의 사인을 밝혀야 한다’며 지난 23일 서울중앙지법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습니다.

 

고 황 공사는 2007년 7월 베이징 주재 대사관에서 근무 중 샌드위치를 먹고 복통을 일으켜 현지 병원을 찾아가 링거액을 맞은 지 10여분 만에 숨졌습니다.

 

고 황 공사의 미망인 박영주씨는 본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최근 심경을 밝혔습니다.

 

박씨는 먼저 황 공사에게 칼슘이 포함된 링거액과 함께 처방한 로세핀에는 ‘사망에 이를 수 있다’는 주의사항이 명기돼 있어, 병원측 실수에 의한 의료사고가 명백하다고 말했습니다.

 

(음성) “우리는 지금까지 황 공사가 어떤 원인으로 돌아가셨는지, ‘의료사고사’ 라는 것은 확실히 아는데 거기에 대한 공식 사인규명을 안해줬다는 거예요. 돌아가신 분께서 ‘평생을 내 직장이다’ 하고 일생을 바친 직장이잖아요. 그 직장을 우리가 법원에다가 바르게 규명해 달라고 호소해야 될 우리 심정도.. 이것은 역사적 비극입니다.”

 

황 공사가 찾았던 비스타 클리닉은 중공 당국이 처음에 주장했던 ‘가장 낮은 1급 수준에도 못 미치는 동네병원’ 이 아니라, 2007년 당시 올림픽 지정 병원으로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습니다.

 

또한 병원 소유주는 중국 공산당 정협(전국정치협상회의) 위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씨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원측의 태도는 의사의 자질을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음성) “진작 고위층이라고 알렸더라면 자기들이 더 좋은 의료진과 더 좋은 서비스를 줬을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기가 막혀요. 제가 11시가 덜 되어 갔을 때 이미 사망선고가 내린 후였어요. 심폐소생을 계속 해달라고 그랬어요. (그런데도) 자기들은 점심 뭐 먹을까 의논합디다. 사람을 죽여 놓고, 담당의사가. 자기 환자가 자기 눈앞에서 죽었습니다. 5분, 10분 만에 그 때가 11시인데 점심 걱정을 하고 왔다 갔다 하더라고요.”

 

박씨는 또 중국 의료행정 당국이 황 공사를 사망케한 이 병원과 담당 의사에 대해 아무런 제재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음성) “유가족 대표가 ‘병원이 인간에 대한 기본 마인드가 없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기본 마인드가 없으니 시정해라. 병원을 폐업해라. 폐업을 하든지 내과라도 폐쇄를 해라’ 하면서 그 의사를 처벌하라 했어요. 담당 의사는 이미 파면되고 근무하지 않고 있다고 알려왔어요. (그런데) 그것도 거짓말이에요. 그 의사는 지금까지도 계속 근무하고 있어요.”

 

박씨는 또 당시 중국 정부의 어이없는 협상안에 놀랐다며 사과 한마디도 못받고 돌아온 유족들이 지금도 깊은 슬픔에 젖어있다고 밝혔습니다.

 

(음성) “첫번째, 중국병원은 유족한테 사과를 할 수 없다. 두번째, 위문금 형식으로 60만 위안 내지 70만 위안을 지급하겠다. 그 당시 한국 돈 7000~8000만원입니다. 세번째, 유족은 차후로 이 문제를 다시 절대 거론하지 않겠다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중한 사과는 꼭 받아야 되겠다. 그리고 중국 정부한테도 받아야 되겠다...그러면 중국정부가 의료사고로 돌아가셨던, 지병으로 돌아가셨던 자국에서 근무하셨던 타국의 고위 외교관이 자기 나라에 와서 죽어서 나갔습니다.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예우를 갖춰야 됩니다...그런데 우리를 도둑놈 몰듯이 쫓아내고 우리는 슬픈 소리 한 마디 못하고 왔어요.”

 

박씨는 한국 정부가 중공 당국의 눈치를 보느라 사인규명을 제대로 못했다면서, 이번 소송으로 이제라도 고 황 공사의 공식적이고 정확한 사인규명이 이뤄지고, 외교부나 재외공관의 근무 환경과 의식에도 개선이 이뤄지는 계기가 될 것을 바란다고 덧붙였습니다.

 

고 황정일(사망당시 52세) 공사는 ‘중국통’ 외교관으로 1996년 동북아2과장 재직 당시 중국과의 끈질긴 협의 끝에 황장엽씨의 한국행을 성사시켜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 2006년 8월 주중한국대사관 공사(대사급)로 부임해 6자회담 및 탈북자, 국군포로 업무 등을 담당하다가 변을 당했습니다.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김경아였습니다.

 

[ 對중국 단파라디오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