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고박정희대통령

[스크랩] 작전명 비둘기 - 5.16군사 쿠데타

녹색열매 2010. 6. 5. 21:50


 

 
 





 <존경하는 참모총장 각하>
각하의 충성스러운 육군은 금16일 3시를 기하여 해공군 및 해병대와 더불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궐기하였읍니다. 각하의 사전승인을 얻지 않고 독단거사하게 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하옵니다. 그러나 백척간두에 놓인 국가민족을 구하고 명일의 번영을 약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아직 이 길 하나밖에 없다는 확고부동한 신념과 민족적인 사명감에 일철(一徹)하여 결사감행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택한 이 방법이 조국과 겨레에 반역이 되는 결과가 된다면 우리들은 국민들 앞에 사죄하고 전원 자결하기를 맹서합니다. 각하께서는 저희들의 우국지성(憂國至誠)을 촌탁(忖度)하시고 쾌히 승낙하시고 동조하시와 나오셔서 이 역사적인 민족과업을 수행하는 시기에 영도자로서 간두에서 지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들은 총장 각하를 중심으로 굳건히 단결하여 민족사적 사명완수에 신명을 받힐 것을 다시 한번 맹서합니다. 소관(小官)이 직접 각하를 찾아뵈어야 하오나 부대를 지휘중이므로 부득이 동료들을 특파하게 되었아오니 양해하여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여불비재배(餘不備再拜)
 
<5월 16일 소장 박정희>
 
 
 
<쿠데타 개요>
 
작전명 - 비둘기
기획자 - 박원빈(중령 6관구사령부 작전참모)
제1대 - 1공수단(1개 대대). 점령목표: 반도호텔과 총리실. 단장 박치옥 대령, 대대장 김제민 중령.
제2대 - 해병여단(1개 대대). 점령목표: 내무부, 치안국, 서울시경. 여단장 김윤근 준장, 대대장 오정근 중령, 부연대장 조남철 중령, 인사참모 최용관 소령.
제3대 - 33사단(1개 대대). 점령목표: KBS1,2방송국, 기독교 방송국, 국제전신국, 중앙전화국. 33사단 작전참모 오학진 중령.
제4대 - 30사단(1개 대대). 점령목표: 중앙청, 청와대, 시경 탄약고, 서대문, 마포형무소, 연희송신소. 작전참모 이백일 중령.  예비대 - 6군단 포병단(5개 대대). 5월16일03시40분까지 육본에 집결. 6군단 작전참모 홍종철 대령, 대대장 신윤창 중령, 대대장 구자춘 중령, 대대장 백태하 중령, 대대장 정오경 중령, 대대장 김인화 중령.
 
 
<쿠데타 일지>
 
1961년 5월 15일
 
오전 9시경 - 박종규 소령, 자치철 대위 및 11명 반도호텔 옆 대호다방에 은신해 반도호텔 구조파악.
           - 박정희, 정문순 중령에게 민주당사 점령 임무 지시.
 
10시경 - 박정희, 자택에서 친서를 5군단장 박임항 중장, 5사단장 채명신 준장, 예하의 포병참모 정봉욱 대령, 작전처 조창대 중령에게 인편으로 전달.
 
11시경 - 박정희, 광명인쇄소사장 이학수를 만나 각 종 전단의 인쇄를 16일00시를 기해 인쇄에 착수할 것을 부탁.
 
12시경 - 박정희, 전남 광주에서 훈련용 경비행기 2대를 이끌고 온 육군항공학교장 이원엽대령에게 2대를 더 준비할 것을 지시함. 이원엽은 즉각 항공학교에 16일 3시까지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하도록 명령함. (혁명 당일 서울 상공을 날던 4대의 비행기- 기록 필름에 담긴 비행기는 모두 이 비행기임)
 
오후13시경 - 친서 전달하고 돌아 온 이낙선은 문안 정서를 시작함.
박정희, 박종규 소령에게서 반도호텔 작전계획 보고를 들음.
             - 박정희, 혁명공약에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는 제6항을 김종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추가함.
             - 박정희, 국방대학원 윤태일과 송찬호 준장에게 전화해 17시까지 방문해 줄 것을 전함.
 
16시경 - 해병여단 실탄 준비.
 
17시경 - 박정희, 윤태일과 송찬호 준장을 접견하며 이한림 설득을 논의함. 참모총장 장도영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전달해 줄 것을 말함.
 
장경순에게 18시까지 방문해 줄 것을 전화함.
 
해병여단, 서울과의 전화선 절단.
 
18시경 - 박정희, 장경순에게 장도영 설득과 1공수단 출동을 감독할 것을 지시함.
              - 조창대, 박임항 채명신과 여관에서 만나 박정희의 친서를 전함.
 
20시경 - 30사단에서 이백일에게 불만을 품은 박상훈 연대장과 이갑영 참모장이 배반하고 사단장 이상국에게 B형 전투단 훈련이 쿠데타 훈련이었으며 출동과 임무를 밀고해 30사단에 비상이 걸림.
문재준, 거사일시 변동상황 없음을 확인하고 돌아감.
 
21시경 - 박용기 집에서 조창대, 이종근, 심이섭, 안찬희, 김덕윤, 김수만, 박용기가 모임을 갖고 박정희 친서를 낭독하고 소거.
 
30사단장 이상국, 이후 가족을 피신시키고 총장 장도영에게 506보안대에서 보고.
 
정도영, 2개 헌병중대를 30사단으로 보냄.(급보라는 소리에 장도영은 김용배 장창국과 은성에서 식사도중 506보안대로 왔다.)
 
장도영, 506부대장 이희영에게 박정희를 미행하라는 지시를 내려 7명을 2대의 짚차로 신당동 박정희 자택으로 보냄.
 
해병단, 군단 전화선 절단.
 
21시 30분경 - 이백일, 6관구 사령부에서 대기중이던 박원빈에게 밀고로 인해 30사단은 출동불가능하며 자신은 피신해 있다고 전화.
 
6관구 사령관 서종철은 계속해서 박원빈의 소재 파악에 나섬.
 
박원빈, 본부사령 소령 계충의에게 사령부 경계강화와 자신의 허락없이는 누구도 출입을 금지시키라는 지시후 33사단으로 향함. (30사단 상황을 설명하고 33사단은 반드시 출동하라고 확인하고 귀대.)
 
              - 김재춘, 시내에서 경등음을 듣고 6관구사령부에 전화해 상황을 묻고 박정희에게 연락한 후 6관구 사령부로 향함. 정문에서 혁명군 장교 20여명과 합류하여 사령부내로 들어감.
 
              - 장도영, 육본장교 20여명이 6관구 사령부에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훈련을 취소하고 귀가하라고 헌병대 급파.
 
              - 6관구 사령관 서종철은 김재춘이 혁명군인줄 모르고 헌병대가 도착하면 색출하여 체포할 것을 명령함.
 
22시경 - 박정희는 항공 작업복에 모자를 쓰고 권총을 차고 김종필, 박종규, 이낙선, 이원엽, 최재명 등과 함께 집을 나설 준비함.
 
육영수가 마지막일지도 몰라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네라며 숙제를 도와 줄 것을 간청해 50분 정도 시간을 할애함.
 
30사단에서 거사 비밀이 누설됐다는 전화 연락이 옴.
 
박원빈, 6관구사령부에서 트럭 10대를 1공수단으로 보냄.
 
22시 30분경 - 참모총장 정도영, 33사단에 전화해서 훈련취소 명령을 내림.
 
1공수단장 박치옥에게도 전화해 훈련계획을 취소하라고 명령했지만 박치옥은 예정된 육본훈련이라서 취소할 수 없다고 대답.
 
              - 6관구 참모장 김재춘, 출동한 헌병대를 속여 사령부내 제사공장으로 유인해 넣고 혁명이 시작됐다고 설득하며 혁명군 장교 20여명에게 캘빈 소총을 분배한 후 박정희를 기다림.
 
22시 50분경 - 박정희, 이낙선과 이원엽 등을 먼저 보내고 집을 나서다가 박정희의 연락을 받고 도착한 한웅진 장경순과 만남.
 
한웅진, 박종규, 장경순, 김종필 등과 함께 두 대의 짚차에 나눠타고 6관구 사령부로 출발함.
 
23시경 - 조창대, 이종근, 심이섭, 안찬희, 김덕윤, 김수만, 박용기 등은 16일05시 혁명방송을 신호로  지시 받은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조창대의 관사에서 대기.
 
             - 1공수단 김제민, 6관구에서 트럭 10대를 조달받고 특수임무조 지휘팀을 기다림.(나중에 박종규만 도착했다.)
 
             - 장도영, 다시 6관구 사령관 서종철에게 전화해 비상을 걸고 육본 장교 해산을 명령.(장도영은 다시 은성으로 돌아가 식사를 마치고 온 후였다.)
 
             - 박정희, 한강 인도교에 잠시 정차하여 김종필은 안국동 광명인쇄소로 향함.
박정희, 506부대 미행차량을 따돌리던 장경순과 엇갈려 영등포와 김포 방향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기다리다 다시 합류함.
 
16일 오전00시경: 박정희, 6관구 사령부 정문에 도착함. 근처에 숨어 있던 혁명군 장교 20여명 합류하여 사령부로 들어감.
 
이석제, 6관구 사령부 정문에서 입장이 저지되자 실패한 것으로 판단하여 이형주와 서류를 태우던 중 박정희와 합류.
 
6관구 참모장실에는 송찬호 윤태일 최재명 등 혁명군 장교 20여명이 대기하고 있었음.
 
장경순, 공수부대 출동을 돕기 위해 공수여단으로 향함.
 
00시 15분경 - 30사단과 33사단 혁명군과 연락이 두절.
 
              - 박정희, 혁명군과 진압군이 혼재된 상황에서 6관구 부사령관실에서 진압군측 20여명에게 혁명의 당위성을 설명함.(현병차감 이광선과 중령 정명환 등이 혁명군에 가담함)  
 
박정희, 작전처 중위 송정택에게 참모총장 장도영에게 친서를 전달하도록 지시함.
 
장도영, 편지를 받고 전화해 혁명 시도를 중단할 것을 강권.
 
              - 해병여단 선두가 출발하고 차례로 트럭 60대가 출동함. 시차를 두고 탱크부대가 출발함.
 
02시경 - 김재춘, 박정희에게 1공수단을 지휘할 것을 건의.
 
장도영, 총리 장면에게 30사단 반란기도를 저지하고, 해병대와 공수단을 한강에서 저지시키고 있다는 보고를 함.(장면의 증언).
 
박정희, 김재춘에게 6관구 장악을 지시하고 한웅진, 이석제, 이형주, 박순권과 함께 1공수단으로 출발함.
 
              - 장도영, 육본직할 헌병대 50명과 트럭 8대를 동원해 한강 다리를 봉쇄하라고 명령.
 
              - 박정희, 공수여단 정문에서 김제민에게 30.33사의 이동 불가능을 설명한후 출동을 지시하고 해병단으로 향함.
 
1공수단장 박치옥, 망설이다 차지철을 중심으로 한 위관장교들이 강행태세를 보이자 출동.
 
              - 박정희, 김포가도에서 해병대 출동 지휘부와 합류.
 
박정희, 염창교 입구에서 6관구에서 출발한 혁명군 장교 10여명과 합류해 만세 삼창으로 지나가는 출동 해병대를 격려.
 
박정희, 연락책에게 33사단에 가서 병력을 출동시키라고 지시.
 
              - 해병여단 출동병력 뒤로 공수여단 출동트럭이 합류.
 
03시 - 6군단 포병단의 전 혁명군 병력(장교68명, 사병1,283명)이 육본을 완전 장악함. 지시대로 목표지점으로 병력이동.
 
             - 김종필, 안국동 인쇄소에서 6군단포병단의 전개 모습을 보고 안심함.
 
03시25분경 - 해병대와 공수대 한강 인도교 남쪽 노량진에 도착.
 
순찰나온 남한강 파출소 경찰관들에게 공포탄을 발사해 해산시킴.
 
한강교에서 해병여단 2중대가 헌병대와 교전.(헌병3명, 대위 이준섭 등 해병대원 6명이 부상).
6군단 포병단이 헌병대 배후 기습하여 공포탄 사격으로 가세.
 
박정희, 교전중인 한강교를 꼿꼿하게 걸어서 도하.  (혁명군에게 신뢰를 심어 준 행동)
 
04시경 - 장도영, 대통령 윤보선에게 신변도모 전화연락. 윤보선, 가족들 피신시키고 청와대에 위치함.
 
04시15분경 - 한강교 돌파해 용산으로 진입. 해병대와 공수여단 육본으로 향함.
 
장도영, 국무총리 장면과 대통령 윤보선에게 피신을 요청.
 
             - 장면 부부, 주한 미대사 사택으로 이동했으나 미대사와 길이 비켜 혜화동 카르멜 수녀원으로 피신.
 
            - 박정희, 찾아 온 신응균 국방차관보와 면담.
 
            - 박정희, 공수여단에게 방송국 점령을 명령. 제2지휘소 남산 방송국으로 출발.
 
04시 30분 경 - 박정희, 공수여단과 함께 KBS라디오방송국에 도착.
공약 선전물이 도착하지 않아 안국동 광명인쇄소로 향함.
 
05시 - 라디오 방송으로 혁명공약을 발표함.
 
07시 - 박정희, 제3지휘소 육군본부로 이동.
 
10시 - 박정희, 청와대에서 윤보선과 면담.
 

                                                    <혁명이란 용어를 함부로 쓰기 싫지만 퍼온거라서^^ㅋㅋ>
 
 
 
<쿠데타 공약>
①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
②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③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킬 것
④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⑤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
⑥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할 것

 

선글라스를 쓴 박정희소장과 수류탄을 찬 차지철 대위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했다면 정말 훌륭한 혁명으로 기록되었을 것을...
아니, 딱 1번만 해먹고 나갔어도 지금쯤 멋진 혁명군,대통령으로 불리고있겠지?
 
제 아무리 경제발전이라 한든 18년동안 독재,공포정치로 민주주의를 짓밟은
이들에게 정당성이 과연 있을까...
 
내가 박정희가 준 빵을 먹어보진 못했지만
빵하나에 인간의 존엄성과 민주주의를 팔아먹진 않았을테니까. 
 
79년 10월. 김재규가 실패했었다면 지금쯤 광주 이전의
부산,마산이 있었겠군. 생각만해도 끔찍하네.
 
 
 
 
출처 : 빨간 꿈을 꾸다
글쓴이 : 빨간 꿈을 꾸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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