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고박정희대통령

[스크랩] 5.18

녹색열매 2010. 6. 5. 14:05


 

오늘
우리들의 증오가
찬란하게 침몰하면서
내 몸 속에 박힌 총알도
울음을 멈추었다
 
눈물은 송진처럼 상처들 위로 뚝뚝 떨어져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너와
나는
하나다
 
 
 
 
부마 항쟁과 유신체제 붕괴의 서곡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의 시민,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에 대항한 반 독재투쟁을 벌였다. 김영삼총재의 의원직 제명안이 국회에서 변칙 통과된 것에 자극을 받은 부산대생이 교내시위에 이어 거리로 나와 부산시청 앞에서 시민들과 합세하여 유신철폐, 독재타도, 야당탄압중지 등을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경찰력이 무너지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 무력 진압했으나 시위는 마산으로 번져갔다. 마산대생과 경남대생을 선두로 시위에 나선 시민들은 경찰과 맞서 격렬하게 충돌하였다.19일 저녁에는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까지 합세, 시위가 기층민으로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20일을 기해 위수령을 선포하고 무력 진압한 결과 이틀간의 마산시위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부마항쟁의 불씨는 10·26사태를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유신체제 붕괴, 신군부의 등장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저격사건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의 갈등이 폭발한 정치적 돌발사태였다. 유신체제는 긴급조치를 선포하고 민주주의를 압살한 군사독재체제였다. 국민들은 1978년 12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에게 더 많은 지지표를 던졌고 김경숙의 죽음을 부른 YH여공농성사건, 야당총재 의원직 제명사건, 부마항쟁의 폭발 등 그 저항이 최고조에 달했다. 유신정권의 말기 권력내부의 암투와 맞물려 1979년 10월 26일 18년간의 장기 집권을 누려온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사망함으로써 마침내 유신체제는 붕괴되고 말았다. 이후 실세로 등장한 신군부와 구군부 사이에 군권장악의 권력투쟁이 야기되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이용하여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무력 점령하는 12·12 하극상 군사쿠데타를 성공시켜 반대세력을 강제 전역시키고 12·12 군사반란세력을 규합, 권력을 장악했다.
 
서울의 봄과 5.15 서울역 시위
1979년 10·26사태이후 서울의 봄은 신군부의 유신연장 음모에 의해 안개정국 속에서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 1980년 3월 신학기부터 각 대학에 학생회와 평교수회가 부활되고 긴급조치로 밀려났던 해직교수와 제적학생들이 학교에 복귀함으로써 학원민주화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노동자들도 노조 민주화, 근로조건 개선을 내세우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27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힘의 응집을 위하여 집회와 가두시위를 일제히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5월 14일 광화문, 종로 등에 5만여명, 15일에는 서울역 광장에 학생, 시민 20만명이 운집하여 계엄철폐, 민주화 추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학생지도부는 국민의 의사가 충분히 전달된 것으로 판단하고 17일부터 정상수업을 받으면서 시국을 관망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계엄사령부는 학생시위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틈을 타서 5·17비상계엄확대조치를 선포함에 따라 그 동안 용솟음쳤던 민주화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5.17내란과 계엄군의 광주 투입
1980년 4월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학생들의 민주화투쟁과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진압하고 정권장악을 목적으로 일부 정치군인들이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단행하였다. 계엄사령부는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및 옥내외 집회 시위의 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직장이탈 및 태업파업의 금지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로써 정치인의 손발을 묶고 학생과 기층민중의 투쟁에 쐐기를 박은 데 이어 18일에는 김대중, 김종필 등 26명의 정치인을 학원, 노사분규 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혐의로 연행하고 김영삼을 연금시키는 등 정치적 탄압을 감행했다. 이러한 조치는 헌법에 규정된 국회통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계엄군을 동원,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한 채 취해진 불법조치였다. 비상계엄의 확대에 따라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부대가 17일 저녁 10시경 광주에 투입되어 전남대, 조선대, 교육대 등에 진주하였다
 
          5.18의 전개과정
                     

 
 
 
5.18 민중항쟁과 미국
     
 
캄캄한 밤
그들은 축제의 밤
껍데기들만 유령처럼 움직이는 밤
밤.
워키토키의 날카로운 잡음이
껍데기 유령들에게
살인을 교사하는 밤
 
1980년 5월 16일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은 존.A.위컴 한 미연합사령관에게 "소요사태 악화에 따라 수도권 질서유지를 위하여 20사단 작전통제권 이양"을 요청하자 연합사령관은 전문을 접수했음을 확인한 후 "귀하의 요청을 승인한다(Your request is approved)"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신군부는 5월 20일 20사단을 원래의 목적이 아닌 "광주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로 보내도 되겠느냐"며 연합사에 부대이동을 문의하자 위컴은 미국정부와 협의한 후 동의(agreed)함으로써 작전통제권을 이양하였다.한편 5월 22일 오후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 고위정책조정위원회(PRC)는 오끼나와에 있는 조기경보기 2대, 필리핀 수빅만에 정박중인 코럴시 항공모함을 한국 근해에 출동시키기로 결정했다. 또 미행정부는 "광주사태가 더 악화될 경우 북한의 남침이 우려된다"고 일반국민에게 광주민중항쟁을 부정적으로 부각시켜 신군부를 두둔했고 무력진압을 합법화시켰다. 묵시적 배후조종자 미국에 대한 반미의 불길은 광주와 부산에서 미문화원이 불타고 서울의 문화원이 점거 당하여 "양키고홈"의 구호가 메아리 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80년대 이후 반미운동은, 민주주의나 양민보호보다 미국의 이익을 위한 체제 옹호적 제국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참고    5.18기념재단 http://www.518.org/welcome.html
          광주민중항쟁의 시각언어공장 http://www.iam518.com/
출처 : 장산곶매
글쓴이 : 장산곶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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