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동족상쟁종합

[스크랩] 6.25전쟁 60년(지리산 숨은 적)<131>먹구름 낀 한라산.

녹색열매 2010. 8. 31. 21:08


 

[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31) 먹구름 낀 한라산


[중앙일보 유광종] 제주 4·3사건은 점차 더 꼬여 가고 있었다. 사건이 터지던 날 제주읍에서 하루를 머물렀던 내가 당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사건이 번지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을 맞았던 즈음의 제주는 좀 특별한 곳이었다. 태평양전쟁에서 몰리던 일본이 미군을 향해 최후의 항전(抗戰)을 벌이려고 준비했던 곳이 제주였다. 해방 직전까지 제주에는 일본군 3개 사단과 1개 여단이 마지막 사수(死守)를 외치며 방어선을 펼쳤다. 그러나 대세가 꺾임에 따라 제주의 일본군도 투항했다. 문제는 막바지 급박한 철수상황에 놓이면서 일본군이 제주 곳곳에 만든 진지와 참호 속에 막대한 무기를 그대로 버려두고 떠났다는 점이다.

당시의 제주도에는 좌익에 일찍 눈뜬 사람이 많았다. 바다로 진출하기 쉬웠던 지리적 여건 때문에 제주도 주민의 상당수가 일본의 오사카(大阪)·고베(神戶)·교토(京都) 등으로 나가 여러 가지 노동에 종사했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사람이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좌익 사상에 물들었던 것이다. 해방 직후에 활동하던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이어 인민위원회가 결성되고 난 뒤 남로당은 이를 장악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우익은 제주도에서 활동이 미미했던 데 비해,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각종 좌익 단체들은 제주도에서 ‘비 온 뒤의 죽순’처럼 마구 번성하기 시작했다.

1946년 7월 김구(金九) 선생이 제주도를 방문하면서 그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의 제주도 지부가 기지개를 펴는가 싶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경제사정까지 나빠졌다. 해방 뒤에 전국적으로 일본 기술인력 등이 빠져나가면서 산업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했고, 제주도의 사정은 더 나빴다. 식량사정까지 악화하면서 제주도의 분위기는 좌익이 번성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치달았다.

그렇게 터진 것이 4·3사건이다. 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기해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한라산 정상과 주요 고지에 일제히 봉화(烽火)를 올리는 것을 신호로 무장폭동을 일으켰다. 우선은 ‘인민유격대’와 ‘자위대’ 대원 350명이 제주도 내 16개 경찰지서 중 12개를 습격했다. 이들은 경찰관과 우익인 서북청년단원, 독립촉성국민회 소속 회원 등과 그 가족들을 살해했다.

제주도는 곧 피가 흐르는 ‘유혈(流血)의 섬’으로 변했다. 주동자였던 제주 인민유격대 총사령관 김달삼이 48년 8월 북한의 황해도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에서 한 연설을 보면 그때의 참상이 잘 드러나 있다. 김달삼은 그 연설에서 “모두 45회 이상의 지서 습격 및 야외전투를 통해 57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각종 시설물을 파괴했다. 다수의 무기를 탈취하는 등 무장투쟁을 가열차게 벌였다”고 말했다.

경찰이 진압에 나섰다. 조병옥 내무장관이 이끄는 경찰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근간이었다. 경찰은 비교적 신속하게 움직였다. 각 도 경찰국에서 1개 중대씩 8개 중대 1700여 명의 경찰을 제주도에 급파하는 등 나름대로 재빨리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인민유격대의 힘이 거셌다. 게다가 제주도 곳곳에는 일본군 3개 사단과 1개 여단이 남겨두고 떠난 무기가 흘러 넘치고 있었다. 경찰력으로는 한계를 보이자 4월 17일 제주도에 주둔 중이던 제9연대에 진압작전을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김익렬 9연대장이 나름대로 준비를 마치고 출동했지만 인민유격대를 만나기조차 힘들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연대 내에 숨어 있던 남로당원 오일균 소령과 문상길 중위가 조종하는 좌익계 하사관들이 작전계획을 인민유격대에 그대로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9연대의 김익렬 소령은 곧 해임됐다. 진압 작전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경비대총사령부는 5월 1일 수원에서 창설한 제11연대를 투입했다. 3개 대대 규모로 편성된 정식 연대급 병력이었다. 그 연대장은 박진경 대령이었다.

그가 죽었다. 전과를 올리던 11연대의 작전도 잠시였다. 6월 18일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한 박진경 연대장의 축하연이 있던 날 밤이었다. 연회장에서 돌아와 영내에서 취침하던 박 대령이 남로당원인 문상길 중위의 지시를 받은 하사관에 의해 암살된 것이다. 당시 군은 경찰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조직력을 갖춘 보조적 역할이었지만 작전에 관해서는 경찰보다 한 수 위였다. 치안유지를 근간으로 하는 경찰과 적을 염두에 두고 전투를 벌이는 군대의 작전은 차원이 달랐다. 11연대의 강력한 진압작전에 위협을 느낀 남로당이 결국 연대장을 암살하는 극약 처방을 쓴 것이다.

이 사건은 좌익이 노렸던 효과보다 훨씬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군의 본격적인 개입과 진압을 부른 것이다. 미군이 특히 이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면서 군의 진압은 강도를 더해 갔다. 박진경 대령은 미군 군정장관이었던 윌리엄 딘 소장과 친했다. 딘 소장은 박 대령을 상당히 신임했다. 그런 박 대령이 남로당원으로 부대에 숨어든 부하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소식은 딘 소장에게 큰 충격이었다.

제주도 폭동의 와중에서 벌어진 연대장 암살 사건을 계기로 경비대 총사령부가 군 내부의 좌익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면서 적극적으로 사태 해결에 나선 데다, 미군까지 문제를 심각하게 다뤄야 한다는 인식을 하게 됐다. 그러나 좌익은 그 준동(蠢動)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그들의 움직임은 벌레가 꿈틀거리는 준동이라기보다 사나운 짐승이 이리저리 뛰는 발호(跋扈)의 상태였다. 남한의 근간을 위협하는 그런 움직임은 더 벌어질 분위기였다. 아주 거센 비바람이 제주도를 휩쓸고 다녔다.

백선엽 장군
정리 =  유 광종  기자 / 블로그 http://blog.joins.com/center/reporter/

출처 : 호림(sohn4303) : 손 국현
글쓴이 : 호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