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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6.25전쟁 60년(지리산 숨은 적)<143>육사동기 박정희. 김안일

녹색열매 2010. 8. 31. 20:55


 

   [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43) 육사 동기 박정희·김안일

                    
                                    
[중앙일보 유광종] 서울 명동의 거리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늘 분주했다. 숙군 작업으로 많은 군인이 법의 심판대에 오르고 있던 때였다. 나도 내 사무실이 있던 그 명동의 거리처럼 당시에는 여유를 전혀 누릴 수 없을 정도로 분주했다. 하기야 당시의 숙군 작업이라는 것은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작업이었고, 게다가 나는 그것을 진두지휘하는 처지에 있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매일 올라오는 보고서를 검토하고, 조사 내용을 들춰보면서 관계자들과 회의를 거듭했다. 정보 보고서에서 좌익으로 분류된 사람을 불러 조사하는 작업은 정보국 방첩과를 중심으로 이뤄졌지만 조사할 대상자를 선별하고 조사 결과를 검토해 법의 심판대에 올려 보내는 마지막 과정은 내가 맡아서 처리해야 했다.

영등포의 창고중대는 좌익으로 분류된 사람들로 넘쳐났다. 내가 머물고 있던 명동의 옛 증권거래소 지하 보호실에도 중요 혐의자들이 꽉 들어차 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안일 당시 방첩과장은 그런 일의 흐름 중 가장 한가운데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그 밑에서 보좌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 김창룡 대위였다. 김 대위는 나중에 악명을 뒤집어쓰고 암살당하고 마는 인물이지만, 그의 업무 추진력은 아주 대단했다. 짧은 기간에 수많은 사람을 불러서 조사를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때로는 무리한 수사를 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올 수 있었지만, 어쨌든 작업은 이 두 사람을 비롯한 조사팀의 노력으로 상당한 탄력을 받아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 과정이 발 빠르게 펼쳐지고 있던 1949년 초. 매우 추웠던 어느 날, 김 과장이 조용히 내 사무실에 들어섰던 것이다. 퇴근 무렵이었고, 그날 하루의 사무는 모두 끝을 맺은 상태였다. 조사 작업의 실무 책임자가 그런 즈음에 내 사무실에 찾아온 게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김 과장을 앉은 채 바라봤다. 그는 주춤거리면서 내 책상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말을 해 보라”면서 그에게 자리에 앉도록 권했다. 나는 사무실 중간에 놓여 있던 응접세트 의자에 그와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았다.

“국장님, 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2기생 동기 중에 박정희 소령이라고 있습니다. 혹시 그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그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었다. 1948년 10월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진 14연대의 반란 사건 진압을 위해 광주에 내려갔을 때 만났던 박 소령의 얘기였다.

그는 남로당 군사 분야의 중요한 책임자라는 혐의를 받아 내가 있던 명동의 옛 증권거래소 건물의 지하 감방에 붙잡혀 있었다. 그는 이미 그 혐의가 밝혀져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였다. 박 소령은 곧 수색에 있는 처형장으로 끌려갈 운명이었다. 집행은 약 10일 뒤로 대강 정해진 상태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과정을 거쳤던 박 소령의 처지를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조사를 내가 직접 진행했던 게 아니라서 상세한 내막을 알고 있지는 못했다. 그저 떠올려지는 것은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진 14연대 반란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내려갔을 때 늘 과묵한 표정으로 작전회의실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던 박 소령의 모습이었다.

당시 박 소령과는 대화를 거의 나눠본 적이 없었고, 좌익 혐의로 불려 왔을 때도 대면한 채 조사를 벌인 경험이 없었던 터라 특별히 어떤 감회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저 ‘참, 박정희 소령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됐었지’라는 생각만이 머리를 스쳤다.

김안일 과장이 말을 이어갔다. “국장님, 박 소령은 참 훌륭한 인재입니다. 비록 남로당 군사책이라는 혐의를 받아 형이 확정됐지만, 참 아까운 사람입니다.” 나도 박 소령에 대해서 언뜻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작전 계획 수립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고, 주변의 몇몇 사람이 칭찬도 했었던 점을 기억했다.

나는 잠자코 김 과장의 말을 듣고 있었다. 김 과장은 “혐의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박 소령은 군 내부의 좌익 색출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입니다. 자신도 남로당에 가입한 점을 무척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한 번 살려줄 수 없겠습니까….”

남로당 군사책으로 혐의가 밝혀져 사형이 확정된 박 소령을 살리는 작업. 대한민국이 막 출범해 사법체계가 모두 갖춰진 상태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런 중대한 판결을 받았던 박 소령을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 올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파묻혔다. 김 소령의 말을 듣고 즉시 판단을 내리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도 김 과장의 표정이 매우 간절했다. 그리고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박 소령을 구명하기 위한 작업은 여러 경로로 펼쳐졌다. 그가 그만큼 인간적으로나, 능력 면에서 좋은 평판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

6·25전쟁이 터진 뒤 나와 늘 격렬한 전쟁 일선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인물이 김점곤 예비역 소장이다. 그는 한때 춘천의 8연대에서 중대를 맡아 일하면서 박 소령을 소대장으로 데리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 또한 박 소령의 인물 됨됨이와 능력을 높이 사고 있던 터라, 나도 모르게 이응준 육군 총참모장을 여러 번 찾아가 박 소령 구명을 탄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키는 내가 쥐고 있었다. 숙군 작업의 총책임자로서 나를 거치지 않으면 박 소령을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김안일 과장은 그 때문에 퇴근 무렵에 있던 나를 사무실로 찾아온 것이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 =  유 광종  기자

출처 : 호림(sohn4303) : 손 국현
글쓴이 : 호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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