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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6.25전쟁 60년(지리산 숨은 적)<154>경찰 끌어안기

녹색열매 2010. 8. 31. 20:45


 

[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54) 경찰 끌어안기


[중앙일보 유광종] 당시 내가 이끈 국군 5사단에는 예하에 3개 연대가 있었다. 19연대는 전북 남원군(현재는 남원시)의 운봉, 구례군 산내 지역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15연대는 전남 광양군(현재는 광양시) 백운산에서, 20연대는 장흥군 유지 지구와 승주군 조계산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다.

나는 충분한 실탄과 화약을 확보해 놓은 뒤 이들에게 부지런히 사격술을 갈고 닦도록 했다. 소대와 분대 단위의 소규모 전술 훈련에도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지리산 주변은 산이 높고 골은 깊은 지형이었다. 따라서 대규모 작전보다는 소규모로 벌이는 전투가 더 많은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씩 전투력이 향상돼 가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크지는 않지만 작은 작전 성과가 조금씩 나오고 있었다.

이들은 지리산 주변에 포진하고 있으면서 그 깊은 산속에 숨어 있는 적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큰 걸림돌은 경찰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지 사정을 잘 아는 경찰과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세부적인 정보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경찰과 군은 업무가 비슷하기도 하지만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다.

적이 무기를 들고 공격해 올 때 이들에 맞선다는 점에서 군과 경찰은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주민들의 일상적인 삶을 군이 알 수는 없었다. 군은 주민과의 접촉이 별로 없는 데다 실제 전투 상황이 벌어질 경우 적만을 상대로 공격과 방어의 작전을 펼칠 뿐이다.

그에 비해 경찰은 주민들의 일상적인 생활을 직접 보호하거나 관리한다. 경찰은 또 그 구성원들이 현지인이거나 그 주변 상황에 매우 밝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매일 주민들과 접촉하면서 마을 주변에서 적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느냐를 감시한다.

38선 등에서 적과 직접 마주한 채 싸움을 벌일 때 경찰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일반 주민과 적이 커다란 간격 없이 붙어 있는 지역에서 작전을 벌일 때 경찰의 힘은 군대의 역량 못지않다.

그러나 당시의 5사단은 국군의 다른 부대와 마찬가지로 경찰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다. 그러나 싸움터는 지리산 주변이었다. 38선처럼 적과 정면에서 맞붙는 지역이 아니라 주민과 빨치산이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한 지리산이었다.

그 때문에 우리는 하루빨리 경찰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했다. 나는 김상봉 전남 도경국장과 자주 만났다. 가능하면 내가 먼저 김 국장을 방문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식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관할 지역의 경찰서도 자주 다녔다.

지리산 인근의 적정(敵情)을 관찰할 때에도 최대한 김상봉 국장, 또는 그 휘하에 있는 많은 지역의 경찰과 동행했다. 그렇게 함께 업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나는 경찰과 많은 친분을 쌓았다. 사단에서 벌이는 일반적인 대민(對民) 업무의 수행 과정에 경찰을 불러들여 함께 이를 지켜보도록 배려도 했다.

경찰은 주민들과 지리산의 빨치산들이 어떻게 관계를 형성하는지, 아니면 주민들이 그들로부터 어떤 피해를 받고 있는지 상세한 정보를 손에 쥐고 있었다. 지리산 주변에 사는 주민들 중 빨치산에게 도움을 주면서 실질적으로는 이적(利敵) 행위를 하는 사람에 대한 정보도 부분적으로는 파악하고 있었다.

이런 경찰의 정보는 5사단이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길잡이였다. 따라서 나는 부단히 경찰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김상봉 국장과의 관계가 두터워지고, 그 밑 주요 간부와의 사이도 친해지면서 그 효과는 점차 크게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5사단 참모와 예하 각 연대장을 비롯한 각급 부대장들이 경찰과 말문을 서로 트기 시작했고, 업무도 함께 진행하면서 사이가 좋아져 가고 있었다. 나는 기회가 닿는 대로 부하들에게 군과 경찰이 유기적인 협조 관계로 발전해야 지리산의 빨치산들과 제대로 맞설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 분위기가 점차 퍼져가고 있었다. 경찰과의 관계가 눈에 띄게 좋아지면서 지리산 주변에 대한 각종 정보가 5사단의 각급 작전 부대에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경찰과의 인화(人和)는 그렇게 점차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많이 도사리고 있었다. 주민들이 토벌 작전을 벌이는 우리 국군을 신뢰의 눈으로 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만주군에 있을 때 익히 들었던 것이 마오쩌둥(毛澤東)의 전술이었다. 그중에서도 마오쩌둥은 군과 인민(人民)의 관계 개선에 상당히 힘을 쏟았다.

그는 국민과 군대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에 비유했다. 물을 떠난 물고기는 살 수 없을 것이다. 물고기가 없는 물도 생명력을 잃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오는 민심(民心)의 편에 서는 전술과 전략으로 자신보다 병력과 화력 면에서 전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났던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대를 물리친 사람이다.

대한민국도 중국의 상황과 다를 바 없었다. 군이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제대로 싸움을 치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러나 당시의 5사단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했다.

나는 현지 주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지리산에서의 싸움이 국군에게 결코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예하 부대의 시찰을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특히 민간의 피해 상황에 예민하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1949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15연대의 광양 백운산 지구 공비 토벌 작전을 시찰하고 광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보성군에 들어서 문덕면 한천마을을 지나는데, 마을이 온통 불타고 있었다. 나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마을을 들어서는데 그 광경이 너무 참혹했다. 주민들이 울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 =  유 광종  기자  /의 블로그 http://blog.joins.com/ykj01/

출처 : 호림(sohn4303) : 손 국현
글쓴이 : 호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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